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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반사/山房閑談

설해목(雪害木)

by 가마실 2025. 5. 12.

 

설해목(雪害木)

 

해가 저문 어느 날,

오막살이 토굴에 사는 노승 앞에 더벅머리 학생이 하나 찾아왔다.

아버지가 써 준 편지를 꺼내면서 그는 사뭇 불안한 표정이었다.

 

사연인즉,

이 망나니를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더 이상 손댈수 없으니,

스님이 알아서 사람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노승과 그의 아버지는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편지를 보고 난 노승은 아무런 말도 없이

몸소 후원에 나가 늦은 저녁을 지어 왔다.

저녁을 먹인 뒤 발을 씻으라고 대야에 가득 더운 물을 떠다 주었다.

이때 더벅머리의 눈에서는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아까부터 훈계가 있으리라 은근히 기다려지기까지 했지만

스님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시중만을 들어 주는 데에 크게 감동한 것이다.

훈계라면 진저리가 났을 것이다.

그에게는 백천 마디 좋은 말보다는 다사로운 손길이 그리웠던 것이다.

 

이제는 가고 안계신 한 노사老師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게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노사의 모습이다.

산에서 살아 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나무들이 많이 꺾인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꺾이게 된다.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가볍고 하얀 눈에 꺾이고 마는 것이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꼴짝에서 나무들이 꺾이는 메아리가 울려올 때,

우리들은 잠을 이룰 수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 앞에서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겨울이 지나면 앓고 난 얼굴처럼 수척하다.

 

사밧티의 온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살인귀 앙굴리말라를

귀의시킨 것은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신통력이 아니었다.

위엄도 권위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자비였다.

아무리 흉악무도한 살인귀라 할지라도 차별없는

훈훈한 사랑 앞에서는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이다.

 

-법정스님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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