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물 만든 게 누구인가?
사람은 대세에 편승하게 돼 있어 상류에 오염물질
잔뜩 쏟아붓고 탁한 하류 욕하는 건 지독한 위선
빈 엘리베이터에 한 사람이 탔다. 그는 늘 하던 대로 몸을 180도 돌려 문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섰다.
그 뒤 여럿이 뒤따라 탔다. 그들은 들어온 방향 그대로, 즉 입구 반대편으로 얼굴이 향하도록 섰다.
그 결과 처음 탄 사람이 여러 사람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입구 반대편에도 문이 있는 엘리베이터가 아니었다. 타고 내리는 문이 하나인 평범한 형태였다.
처음 탄 사람은 어리둥절해 하면서 눈치를 봤다. 엘리베이터가 2층에 도달하자 한 사람이 더 탔다.
그도 들어온 방향 그대로 자리를 잡고 섰다. 처음 탄 사람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는 45도쯤 어정쩡한 각으로 몸을 틀었다. 3층에서도 한 명이 더 탔다.
그 사람도 문을 등지고 섰다. 처음 탄 사람은 몸을 슬금슬금 더 돌렸다. 90도쯤의 엇각이 됐다.
4층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처음 탄 사람은 소심한 ‘저항’마저 포기했다.
과감하게 몸을 돌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섰다. 굳었던 표정이 풀리기 시작했다.
결국 2∼3분 만에 모든 사람이 한 방향을 보는, 질서정연한 통일이 이뤄졌다.
수년 전에 한 방송사가 내보낸 몰래카메라 실험 장면이다.
처음 탄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고, 나머지는 각본에 따라 연기했다.
이 실험 고안자는 미국 심리학자 솔로몬 애시(1907∼96)다.
그는 인간의 동조·순응(conformity) 성향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실험을 했다.
엘리베이터 승객 바보 만들기가 그중 하나다.
첫 탑승자가 비정상(층수 표시등을 보기 어려우니 비효율적이고 버튼 조작도 불편하다)에
합류한 이유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대세를 따르는 게 편해서 또는 그곳 규칙을 나만 모르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 때문에.
애시의 실험은 인간의 판단력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집단의 풍토나 분위기가 구성원의 행동을 얼마나 빨리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준다.
이쯤에서 최근의 과거를 돌아보자.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수상한 주식 투자를 한 게 인사 검증 과정에서 문제가 됐는데,
대통령이 임명장을 줬다. 법무부 장관의 가족이 온갖 부정행위를 동원해
다른 젊은이 몫의 의학전문대학원 자리를 도둑질했다.
그 가족은 법원 판결을 받고도 대법원에서 확정된 게 아니니 죄가 없다고 한다.
후임 장관은 그 가족을 향해 “장하다”고 했다. 반어법을 쓴 게 아니라 진짜 칭찬이었다.
위안부 피해자 성금을 횡령한 이는 버젓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있다.
부동산 문제에 국한해 보면 이렇다.
대통령 부인 친구인 정치인은 지방 도시 부동산을 가족 명의로 산 게 문제가 됐다.
그는 법원에서 권력을 이용해 개발 정보를 입수했다는 판단을 받고서도
“남들도 다 아는 정보였다”며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청와대가 투기 근절을 외치던 때 ‘영끌’을 해 재개발 지역 건물을 사들인 당시
대변인은 며칠 전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청문회에서 농지 매수 사실이 드러난 장관 후보자는 의사인 부인이 15년간 농사를 지었다고 주장했다.
그 역시 임명장을 받았다. 대통령이 퇴임 후 기거할 사저 부지에 농지가 포함돼 있고
형질 변경(택지로)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청와대는 “불법이 없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왜 불법이 아닌지를 조목조목 설명하지 않는다.
지도층이 법 또는 규범을 어기고도 잘못이 아니라고 우기는 사례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그러니 정상이 비정상이 되고, 비정상이 정상이 된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게 부질없어진다.
꿋꿋이 홀로라도 엘리베이터 문 쪽을 보고 서 있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신재민 전 서기관과 현모씨(추미애 전 장관 아들 휴가 문제 제보자)처럼.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에게 죄가 없다는 주장이 아니다.
상류에 오염물질을 쏟아붓고서 하류에 맑은 물이 흐르지 않는다고
목소리 높이는 자들의 위선을 말하려는 것일 뿐이다.
글 / 중앙일보 칼럼/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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