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봄 혼인 예정인 필조, 몸종 ‘동지’에게 은밀한 부탁을 하는데…
월림이가 시집간 지 2년도 안돼 보따리를 싸들고 친정으로 돌아왔다. 월림이를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은 바로 뒷집 친구 필조였다. 월림이와 필조는 앞뒷집에 사는 사촌보다 가까운 사이로 젖떼기 전부터 함께 뒹군 또래이자 자매 같은 친구다. 두 친구가 부둥켜안았는데 월림이는 흐느꼈다. 덩달아 필조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꽃 피고 새 우는 내년 봄 춘삼월에 혼례날짜를 받아놓은 필조는 이태 전 시집간 월림이에게 물어볼 말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런데 눈물부터 쏟으니 결혼생활이 심상치 않았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태 전, 양반 대갓집 맏딸 월림이가 이웃고을 유 대감댁 맏아들에게 시집가던 날엔 온 고을이 떠들썩했다. 하지만 들리는 소문이 썩 밝지만은 않더니 쫓겨났는지 제 발로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친정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월림이가 제 어미한테도 말하지 못할 내밀한 사연을 친구 필조한테 털어놓기 시작하자 내년 봄에 결혼할 필조는 남의 일 같지 않아 귀를 쫑긋 세워 한마디도 놓치지 않았다.
월림이의 신랑은 백면서생으로 삐쩍 마르고 핏기 없이 손마디만 길쭉했다. 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첫날밤도 곤드레만드레 취해 새 신부의 옷고름도 풀지 않았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술이 떡이 돼 쓰러졌다. 한 장날 터울이 지나서야 월림이의 옷고름을 풀었지만 몇번 껍적거리다가 나가떨어졌다.
신랑이 합방을 피하기 시작했다. 태기가 없자 시어머니가 닦달을 해 친정에 돌아와 한숨만 쉬었다. 월림이 쫓겨나다시피 시댁을 떠날 때는 억울하게도 석녀 누명까지 썼다.
새벽닭이 울 때까지 월림이 눈물을 흘리다 한숨을 토하며 필조에게 한을 털어놓았다. 앞뒷집 담벼락 사이 샛문을 통해 집으로 돌아온 필조는 잠이 오지 않았다. 며칠 동안 월림이의 하소연을 듣던 필조가 어느 날 별당에서 그녀의 몸종 동지와 마주앉았다.
“아씨, 무슨 말 못할 걱정이라도 있나요?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찼습니다.”
동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래. 큰 걱정거리가 있다.” 필조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내 걱정을 덜어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
동지가 놀란 토끼처럼 쪼그려 앉았다. 동지는 대를 이어 필조네 노비로 살아왔다. 십칠년 전 총각 노비였던 억쇠는 필조 아버지 이 진사의 심부름으로 물 건너 이 진사의 첩집을 들락거렸다. 이 진사는 기생의 머리를 얹어주고 첩살림을 차렸던 것이다. 어느 날, 억쇠가 이 진사의 첩과 함께 도망을 쳤다. 이 진사는 노련한 추노꾼 셋을 사서 풀었다. 며칠 만에 잡혀온 억쇠는 온몸이 피범벅이 되도록 맞아 며칠 앓다가 죽었고, 함께 잡혀왔던 첩은 배가 불러오더니 아기를 낳았다. 그 처녀가 바로 동짓달에 태어났다고 동지가 됐다. 어느 날 밤, 이 진사가 첩의 옷고름을 풀고 치마를 벗기려다 첩의 은장도에 한쪽 눈알이 빠졌다. 첩은 어린 딸, 동지를 남겨두고 목을 매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동지는 제 어미·아비의 비참한 죽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라면서 항상 해맑았다. 이 진사의 외동딸 필조보다 두살 아래인 열일곱살 동지는 어릴 때부터 필조의 몸종이 돼 입속의 혀처럼 온갖 수발을 다 들었다. 필조가 동지에게 월림이가 친정으로 돌아온 사연을 다 얘기해주고 귓속말을 하자 동지는 깜짝 놀랐다.
눈이 펄펄 쏟아지는 날 밤,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 쓰던 산골짝 외딴 제사(祭舍)에서 홀로 공부하던 총각 을병이는 인기척에 문을 열고는 크게 놀랐다. 늦은 밤 삼경에 허리춤까지 빠지는 폭설 속에서 장옷을 덮어쓴 앳된 처녀가 길을 잃고 헤매다 여기까지 왔노라며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처녀는 거기서 밤을 새우고 이튿날 언제 눈이 왔냐는 듯 해가 중천에 걸렸을 때 그 집을 나왔다. 그녀는 동지였다.
필조가 침을 삼키며 “그래서 어떻게 됐어?” 묻자, 동지가 태연스럽게 말했다. “그 사람 너무 점잖았어요. 제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더라고요.”
그 사람, 을병이는 필조와 혼약을 한 전 대인의 맏아들이다. 필조는 손수 서찰을 써서 매파를 통해 파혼을 통보했다. 양쪽 집안이 발칵 뒤집혔으나 당사자인 신부가 그 남자와 결혼하면 죽겠다고 악다구니를 쓰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재가했다 해서 과거 응시자격이 없던 을병이는 한을 품고 있다가 그 악법이 풀리고 나니 급제를 했다. 어사화를 꽂은 복건을 쓰고 말을 타고 한양에서 내려온 을병이는 벌써 살짝 배가 불러온 동지를 안아서 말 위에 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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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조는 기절하고, 그 어미·아비는 털썩 주저앉았다.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 (300)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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