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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반사/感動.野談.說話

화천댁과 정 떼기

by 가마실 2022. 12. 12.

화천댁과 정 떼기

 

 

젊었을 적부터 유 초시는 부인 회천 댁을 끔찍이 사랑해 우물에서 손수 물을 길어다 부엌에 갖다 주고동지섣달이면 얼음장을 깨고 빨래하는 부인이 안쓰러워 개울 옆에 솥을 걸고 장작불을 때 물을 데웠다봄이 되면 회천 댁이 좋아하는 곰 취를 뜯으러 깊은 산을 헤매고 다니고 어디서 봉선화 모종을 구해다 담 밑에 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날이 되면 유 초시는 회천 댁이 좋아하는 검은 깨엿을 가장 먼저 사서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이러니 회천댁 은 동네 여인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단 하루라도 회천 댁처럼 살아봤으면 한이 없겠네.” “회천 댁은 무슨 복을 타고나 저런 신랑을 만났을꼬.”

 

회천댁도 유 초시를 끔찍이 사랑해 봄이면 병아리를 서른 마리나 사와 정성껏 키워 유 초시 상에 백숙을 올리고바깥출입도 없이 유 초시를 하늘처럼 받들었다.

 

부부는 슬하의 삼남 일녀를 모두 혼례를 치러 세간을 내고 맏아들 내외와 살며 열손가락으로 꼽기에 넘치는 친손과 외손을 두었다살림살이는 넉넉하고 속 썩이는 식솔도 없어 유 초시는 오십 초반에도 얼굴에 주름 하나 잡히지 않았다친구들은 거의 모두가 젊은 첩을 얻었건만 유 초시는 오로지 회천 댁뿐이다.

 

유 초시는 요즘도 장날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품속에서 검은 깨엿을 꺼내 회천 댁 손에 쥐여 주고 회천 댁 치마끈을 푼다기나긴 운우의 정을 나눈 후 땀에 흠뻑 젖은 회천댁 이 베갯머리송사로 한평생 나리의 사랑을 듬뿍 받아 소첩은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첩을 얻으셔도” 하면 유 초시는 그때마다 입맞춤으로 회천 댁의 입을 막았다.

 

그러던 어느 날밥맛이 없다며 상을 물린 유 초시는 외출하고 돌아와 저녁상도 두어 숟갈 뜨다 말더니 그날 밤 잠을 못 자고 한숨만 쉬었다이튿날부터는 사람이 달라졌다회천 댁이 찬모를 제쳐 놓고 정성껏 차려 온 상을 간이 맞지 않는다고 던져 뜨거운 국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회천 댁은 팔에 화상을 입었다.

 

한평생 말다툼 한번 없었던 사이에 이게 어찌 된 일인가그 점잖던 유 초시 입에서 천박한 욕지거리가 예사로 튀어나왔다. “저년을 데리고 한평생 살아온 내가 바보천치지!” 한집에 사는 맏며느리 보기가 부끄러워 회천 댁은 홍당무가 되었다유 초시는 이제 잠도 사랑방에서 혼자 자더니 어느 날 첩살림을 차렸으니 찾지 마” 한마디를 남기고는 집을 나갔다.

 

회천 댁은 눈물로 나날을 보내다 어느 날부터인가 이를 악다물고 그놈의 영감탱이 눈앞에 안 보이니 속 편하네” 하며 생기를 찾았다.

 

집을 나간 유 초시가 한 달 만에 돌아왔다손자 손녀들과 아들 내외가 맨발로 마당을 가로질러 반겼지만 회천 댁은 나오지 않았다유 초시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눈은 빨갛고 얼굴은 검고 팔다리는 살이 쪽 빠졌는데 배는 불룩 솟아올랐다그러더니 삼일 만에 이승을 하직했다정나미가 떨어진 회천댁 은 49재 내내 눈물도 나지 않았다.

 

가장이 된 맏아들이 삼베 두건을 쓴 채 장 보러 갔다 와서 제 어미 방에 검은 깨엿을 놓고 갔다한입 깨물다가 눈물이 쏟아져 회천 댁은 보료 위에 엎어졌다봄이 되자 맏아들이 곰 취를 한가득 따왔다어디서 구했는지 봉선화 모종을 가져와 담 밑에 심었다그날 밤 회천 댁이 맏아들을 불러 앉혀 놓고 다그쳤다딱 잡아떼던 맏아들이 마침내 털어놓았다.

 

아버님께선 의원한테 죽을병이라는 걸 듣고 정을 떼려고 어머니께 그렇게 모질게 대했던 겁니다제게 당부를 하시더군요장에 가면 깨엿을 사다 드리고 봄이 되면 곰 취를 따다 드리고 담 밑엔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꽃봉선화를 심으라고.” 회천 댁의 대성통곡에 맏아들도 목이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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