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호 (지관)
구월산 도사에게 주역을 배우고 있는 열일곱 총각 지헌은 그날도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30리나 떨어진 집으로 가려고 험한 산길을 타고 있었다. 검 바위를 돌다가 지헌은 걸음
을 멈췄다. 자색이 빼어난 어떤 여인이 발목을 감싸 쥐고 있다가 지헌을 보더니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엇다. 발목이 삐었다는 여인을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어 들쳐 업고 그녀가
가리키는 대로 토끼 길을 따라가자 숲 속에 아담한 기와집이 나타났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여인이 시키는 대로 찬물을 떠 와 그녀의 발목을 주물러 주었다. 그
녀가 홑치마를 올려 희멀건 허벅지를 드러내자 지헌은 고개를 돌렸지만 아랫도리가 뻐
근하게 솟아올랐다. 그녀는 발목이 씻은 듯이 나았다며 야릇한 미소를 흘리더니 주안상
을 들고 왔다. 술 한 잔에 몽롱해진 지헌은 그녀의 손에 이끌려 촛불을 끄고 금침 속으로
들어갔다.
지헌의 가슴은 두 근 반 세근 반 쿵쿵 뛰었다.
생전 처음 여인과 함께 이불 속에 들어간 지헌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반듯이 누웠는데,
벌거벗은 여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지헌의 옷을 벗겼다. 그녀의 화려한 방중술에 지
헌은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천둥번개가 치듯 질펀하게 운우가 지나간 후 지헌이 또
한잔 술을 받아 마시자 다시 촛불이 꺼지고 거친 숨소리가 방을 덮었다. 삼경이 되어서
야 지헌은 그 여인의 집을 나와 후들거리는 발걸음으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도 도사의 초막을 나온 지헌은 그 여인에게로 손살같이 달려갔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지헌의 발걸음은 그 집으로 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역 책에 침을 흘리며
졸고 있던 지헌을 바라보며 도사가 헛기침을 했다.
“네 육신은 곪아 가고 혼은 빠져 가는구나.”
도사의 말에 지헌이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지헌도 자신이 수척해진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도사 집만 나오면 지헌의 발걸음은 귀신에 홀린 듯 그 여인의 집으로 향했다. 지헌
의 눈은 흐리멍덩해지고 볼은 쑥 들어가고 팔다리는 가늘어졌다. 어느 날 도사는 주역을
덮고 정좌한 후 지헌에게 말했다.
“나는 네 일을 다 알고 있다.
오늘이 네가 살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다. 구슬이 네 입으로 들어오면 즉시 삼켜 버리도록
해라. 그리고는 하늘을 보고 자빠져라.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느니라.”
그날 밤, 지헌은 또다시 그 집으로 가 여인과 질펀하게 운우의 정을 나눴다. 여인은 사랑
을 나눌 때 꼭 구슬 하나를 입에서 입으로 주고받는 묘한 버릇이 있었다. 지헌이 그 여인
의 입에서 뜨거운 입김과 함께 구슬을 받아 물었을 때 ‘오늘이 네가 살 수 있는 마지막 날’
이라고 한 도사의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지헌은 구슬을 꿀꺽 삼켰다. 그러자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솟구쳤다.
지헌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하늘을 보고 자빠지라는 도사의 말을 잊어버리고 땅을 보고 납
작 엎드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와집과 여인은 온데간데없고 꼬리가 아홉 개가 달린
커다란 암 여우가 혀를 뽑고 죽어 있었다. 이튿날 도사가 말했다.
참 아쉽도다. ”위로 자빠졌으면 하늘을 알게 됐을 텐데 엎어졌으니 땅은 알겠구나.”
세월이 흐르고 흘러 지헌은 땅의 풍수에 통달한 이름 있는 지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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