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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만든 나라인데(2) : 정주영과 현대조선소

by 가마실 2021. 3. 22.

어떻게 만든 나라인데(2) : 정주영과 현대조선소

(한국인 / 2021. 03. 15)

 

어떻게 만든 나라인데 문재인은 나라를 다 말아먹고

그것도 모자라 나라를 통째로 북괴에 내주려 하나요?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들...

박정희, 정주영, 김우중, 이병철...

 

그들이 그리워집니다.

그 놀라운 역사의 한 장면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좀 길지만...

 

====================

 

거북선과 정주영

(이만호 / 2020. 12. 26 / 거북선과 정주영)

 

1970년 5월초 어느날 밤 정주영은 청와대 뒤뜰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오랜 시간 흘렀지요. 박 대통령이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고 담배를 하나 피워 물더니 정주영에게도 한 대를 권했습니다. 정주영은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요. 그러나 그날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원래 과묵한 박 대통령이지만 이날은 더욱 말이 없이 시간만 흘렀습니다. 정주영은 박 대통령이 불을 붙여준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고 있었는데, 드디어 박 대통령이 입을 열었어요.

 

​“한 나라의 대통령과 경제 총수 부총리가 적극 지원하겠다는데 그거 하나 못하겠다고 여기서 체념하고 포기를 해요? 어떻게 하든 해내야지! 임자는 하면 된다는 불굴의 투사 아니오?”

 

​실은 정주영도 조선소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제반 여건상 지금은 아니고 나중 일이었어요. 하지만 대통령은 그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압박 아닌 압박을 하고 있었지요. 이유는 있었습니다. 곧 포항제철이 완공되는 때였지요. 그러니까 포항제철에서 생산되는 철을 대량으로 소비해줄 산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당시 김학렬 경제부총리는 먼저 삼성 이병철에게 조선 사업을 권유했어요. 정주영은 삼성 이병철에게 거절당한 뒤 자신에게 화살이 날아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정주영은 그날 박대통령에게 승낙을 하고 말았어요

 

​"각하의 뜻에 따라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심 했어요. ​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 못할 것도 없지! 그까짓 철판으로 만든 큰 탱크를 바다에 띠우고 동력으로 달리는게 배지 뭐! 배가 별건가? ”

 

​어렵고 힘든 일에 부딪치면 쉽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정주영의 특기가 발휘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정주영은 조선업자로 조선소 건설을 생각한게 아니라 건설업자로서 조선소 건설을 생각한 것입니다. 배를 큰 탱크로 생각하고 정유공장 세울 때처럼 도면대로 철판을 잘라서 용접을 하면 되고 배의 내부 기계는 건물에 장치를 설계대로 앉히듯이 도면대로 제자리에 설치하면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조선소를 지을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대형 조선소를 지으려면 해외에서 차관을 들여와야 하는데 해외에서 차관 얻기란 하늘에 별따기였지요. 그래서 일본에도 가고 미국에서 갔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정주영을 상대해주지 않았지요. 오히려 미친놈 취급만 당하고 말았습니다.

 

“너희같은 후진국에서 무슨 몇십 만톤의 배를 만들고 조선소를 지을 수 있느냐?”

 

​좀처럼 화를 내지않는 정주영이었지만 속으로 울화가 치밀면서 약이 바짝 올랐습니다. 그때부터 <하면 된다>는 모험심이 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안 된다고? 그래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는 거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 ..."

 

당장 필요한건 돈이었습니다. 해외에서 차관을 얻으려면 3번에 걸친 관문을 뛰어넘어야 했습니다. 일본과 미국에서 외면당한 정주영은 영국 은행의 문을 두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행 버클레이즈와 협상을 벌였으나 신통한 반응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우선 돈을 빌리기 위해선 영국식 사업계획서와 추천서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정주영은 1971년 영국 선박 컨설턴트 기업인 A&P 애플도어에 사업계획서와 추천서를 의뢰했습니다. 타당성 있는 사업계획서와 추천서가 있어야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후 사업계획서는 만들어졌지만 추천서는 해줄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정주영은 영국의 유명한 조선회사 A&P 애플도어 회장의 추천서를 받기 위해 직접 런던으로 날아갔습니다. 그에게는 조선소를 지을 울산 미포만의 황량한 모래사장을 찍은 흑백사진 한 장이 전부였습니다. 런던에 도착하여 일주일 만에 A&P 애플도어의 찰스 롱바톰 회장을 어렵사리 만났습니다. 그러나 롱바톰 회장은 비관적인 말만 되풀이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배를 사려는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고 또 현대건설의 상환능력과 잠재력도 믿음직스럽지 않아 힘들 것 같다”

"그러면 한국 정부가 보증을 서도 안 됩니까?"

"한국 정부도 그 많은 돈을 갚을 능력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지요. 이때 궁하면 통한다는 정주영식 기지(奇智)가 발동했습니다. 정주영은 문득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는 500원짜리 지폐가 생각났지요. 지폐 그림은 바로 거북선이었습니다. 정주영은 주머니에서 거북선 그림의 지폐를 꺼내 테이블 위에 펴놓으며 말했습니다,

 

​"회장님! 이걸 잘 보십시오. 이 지폐는 자랑스런 우리나라 역사를 그려낸 지폐인데, 이 그림은 거북선이라는 철로 만든 함선이지요. 당신네 영국의 조선 역사는 1800년대부터지만 한국은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 거북선을 만들어냈고 이 거북선으로 일본과의 전쟁에서 일본의 함선을 괴멸시킨 역사적인 철선입니다. 한국이 가지고 있는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바로 이 돈 안에 담겨있으니 다시 한번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롱바톰 회장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지폐를 들고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앞면에는 한국의 국보 1호인 숭례문이 있고 뒷면에는 바다에 떠있는 배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거북이와 많이 닮았어요.

 

 

​"정말 당신네 선조들이 실제로 이 배를 만들어 전쟁에서 사용했다는 말입니까?"

"그렇구 말구요.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이 만든 배입니다. 한국은 그런 대단한 역사와 두뇌를 가진 나라입니다. 불행히도 산업화가 늦어졌고 그로 인해 좋은 아이디어가 묻혀 있었지만 잠재력만은 대단한 나라입니다. 우리 현대도 자금만 확보된다면 훌륭한 조선소와 최고의 배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회장님! 버클레이 은행에 추천서를 보내주십시오"

 

​정주영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당당한 태도로 롱바톰 회장을 설득했어요. 롱바톰 회장은 잠시 생각한 뒤 지폐를 내려놓으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당신은 정말 훌륭한 조상을 두었소. 당신은 당신네 조상들에게 감사해야 할 겁니다."

 

롱바톰 회장의 얼굴에 어느새 환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거북선도 대단하지만 당신도 정말 대단한 사람이오. 당신이 정말 좋은 배를 만들기를 응원하겠소"

 

그러면서 롱바톰 회장은 얼굴에 환한 미소와 함께 축하 악수를 청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프레젠테이션과 완벽하게 만든 보고서에도 'NO'를 외쳤던 롱바톰 회장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바로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이었으며 이는 정주영의 번뜩이는 기지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날 롱바톰 회장은 현대건설이 고리원자력 발전소를 시공하고 있고 발전계통이나 정유공장 건설에 풍부한 경험도 있어 대형조선소를 지어 큰 배를 만들 능력이 충분하다는 추천서를 버클레이즈 은행에 보내주었습니다.

 

정주영의 기지(奇智)로 첫 번째 관문이 통과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며칠 뒤 버클레이즈 은행의 해외 담당 부총재가 점심을 같이 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점심 약속 하루 전 정주영은 호텔에서 초조와 불안 속에서 시간을 보내느니 만사 제쳐놓고 관광이나 하는 게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현대건설 수행원들과 셰익스피어 생가와 옥스퍼드대를 둘러보고 낙조 무렵에는 윈저궁을 관광했습니다.

 

이튿날 정주영은 우아한 영국 은행의 중역 식당으로 안내되었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버클레이즈 은행의 해외담당 부총재가 물었습니다.

 

“정 회장의 전공은 경영학입니까? 공학입니까?”

 

소학교만을 졸업한 정주영은 짧은 순간 아찔했지요. 그러나 태연하게 되물었습니다.

 

“아, 제 전공이오? 그 이전에 우리가 당신네 은행에 제출한 사업계획서는 보셨는지요?”

“네, 잘 봤습니다”

 

정주영은 순간적으로 전날 관광하다가 옥스퍼드대에 들렀을 때 졸업식 광경을 본 생각이 났습니다.

 

“어제 내가 그 사업계획서를 가지고 옥스퍼드대에 갔더니 한번 척 펼쳐보고는 바로 그 자리에서 경영학박사 학위를 주더군요”

 

정주영은 태연하게 농담을 했습니다. 정주영은 구질구질하게 자신이 학력은 짧지만 사업 경험은 누구보다 많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큰 배포를 보여주는 유머를 내던졌습니다. 그러자 부총재가 껄껄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옥스퍼드대 경영학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도 그런 사업계획서는 못 만들 겁니다. 당신은 그들보다 더 훌륭하군요. 당신의 전공은 유머이시군요? 우리 은행은 당신의 유머와 함께 당신의 사업계획서를 수출보증국으로 보낼테니 행운을 빌겠습니다”

 

이 얼마나 멋지고 통쾌한 일입니까? 정주영의 유머 한마디가 그 어려운 차관을 이끌어 낸 것입니다. 부총재가 정주영을 만나자고 한 건 자신들이 빌려줄 돈으로 조선소를 만들려는 CEO의 됨됨이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부총재는 이런 식의 만만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CEO라면 대출을 해 주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최종적인 확인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정주영이 은행 쪽으로부터 오케이 사인을 받은 건 사전에 치밀한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현대건설은 치밀한 사업계획서를 만들었고 그 치밀함을 인정한 은행이 대출을 해주기로 결정한 것이지요. 은행 쪽은 사전에 현대가 건설한 화력 발전소, 비료 공장, 시멘트 공장을 치밀하게 조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확신은 정주영의 배포가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번째 관문도 무사히 통과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가장 어렵고 힘든 관문이었습니다. 영국은행이 외국에 차관을 주려면 영국 수출신용보증국(ECGD)의 보증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수출신용보증국 총재는 배를 살 사람의 계약서를 가지고 와야 승인해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만약 내가 배를 구입한다고 가정했을 때 작은 배도 아니고, 4~5천만 달러짜리 배를 세계 유수의 조선소들을 다 제쳐놓고 선박 건조 경험도 전혀 없고 또 조선소도 없는 당신에게 배를 주문하겠습니까? 설사 당신네가 배를 만들 수 있다 해도 사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원리금을 갚을 수 있겠소? 입장을 바꾸어 당신이 나라면 배를 주문할 사람이 없는데 보증을 해주겠소? 그러니까 배를 살 사람이 있다는 확실한 증명을 내놓지 않는 이상 나는 이 차관을 승인할 수 없소”

 

​정말 난감했지만 정확한 지적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너무도 가난한 나라였어요. 그런 가난한 나라에서 배를 만든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배를 만든다고 해도 그 배를 믿고 사갈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정주영은 다시 울산 미포만의 황량한 바닷가의 사진을 꺼내놓고 깊은 시름에 잠겼습니다. 자신처럼 정신 나간 사람을 찾아야 했습니다.

 

​"내가 누구냐? 천하의 정주영 아니냐? 여기서 무너질 내가 아니지!"

 

그날부터 마음을 다잡아먹고 존재하지도 않는 조선소에서 만들 배를 사줄 선주를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허허 벌판 모래사장 사진 한 장을 내밀며 ‘당신이 내 배를 사주겠다고 계약만하면 내가 영국에서 돈을 빌려 이 백사장에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어주겠소’ 한다면 미친놈 취급당하기 딱 맡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 만나고 두 번 만나고 세 번 만나니까 그런 정신 나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이었던 그리스의 리바노스였습니다. 리바노스가 정주영의 배포를 믿고 미포만 백사장 사진만 보고 계약을 했어요. 선박에는 세계적인 리바노스지만 정주영의 사람 됨됨이에 밀려 파격적으로 정주영과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하지만 정주영 역시 그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틀림없이 좋은 배를 만들어주겠다. 대신 배 값을 싸게 해주겠다. 만약 약속을 못 지키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주겠다. 그래서 계약금은 조금만 받겠다. 우리가 배를 만드는 진척상황을 보고 조금씩 배 값을 내라 우리가 만든 배에 하자가 있으면 인수를 안 해도 좋고 원금은 몽땅 되돌려주겠다”

 

정주영은 리바노스가 보낸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스위스에 있는 그의 별장에 가서 유조선 2척을 주문받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 관문을 넘어섰습니다. 정말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신화적인 이야기지요. 그 뒤부터 정주영은 부하직원이 어렵다고 하면 "해보기나 했어" 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냈다고 합니다.

 

정주영은 귀국하여 곧바로 박정희 대통령께 보고를 드렸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정문 앞까지 달려 나와 그를 맞았습니다. 그때 지도를 놓고 볼펜으로 그리며 본인의 구상을 설명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빙그레 웃으며 비서들에게 정회장이 볼펜으로 그리는 대로 공장을 짓게 해주고 정부에서 지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지원하라고 지시를 했다고 합니다. 훗날 박대통령은 울산현장에 자주 들러 막걸리를 같이 나누며 정주영을 격려했다 합니다.

 

하지만 그건 준비 작업에 불과했습니다. 먼저 배를 만드는 조선소를 짓고 그 조선소에서 다시 배를 만들어야 했지요. 그러나 정주영은 이때 그의 특기인 역발상 창의력을 발휘했습니다.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조선소는 조선소이고, 선박 건조는 선박 건조다. 반드시 다 지어진 조선소에서 선박을 만들어야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것이냐?”

 

​그러면서 정주영은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병행해서 진행시켰습니다. 제일 먼저 스웨덴에서 배 만드는 설계사를 데려왔습니다. 배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배 만드는 공장도 없으면서 모래사장의 모래를 포크레인으로 퍼내고 웅덩이를 파놓고 거기에 올라오는 물을 펌프로 퍼내 가면서 그 웅덩이 속에서 최초의 배를 만들었습니다.

 

​공장도 없이, 도크도 없이... 모래를 퍼내 놓고 그 속에서 리바노스가 주문한 배 한 척을 만들면서 동시에 방파제를 쌓고, 바다를 준설하고 안벽을 만들고, 도크를 파고, 14만평의 공장을 지었습니다. 거의 모든 직원들이 새벽 4시면 일어나 여기저기 고인 웅덩이 물에 대충 얼굴을 씻고 일터로 나가 밤늦게까지 일하고 숙소에 돌아와 구두끈도 못 푼 채 잠을 자며 배를 만들었습니다.

 

​정주영도 거의 울산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어쩌다 서울에 오면 새벽 4시에 어김없이 서울에서 울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른 새벽 남대문 근처를 지날 때면 부부가 그날 팔 물건을 리어카에 싣고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며 길을 지나는 장사꾼들을 보곤 했지요. 그럴 때마다 정주영은 자신도 모르게 목젖이 뜨거워졌습니다. 저렇게 새벽부터 열심히 일을 해야만 생계를 꾸려갈 수 있고 자식을 키울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임이 너무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 모든 이들의 삶은 다 그 자리에서 나름대로 진지하고 엄숙한 것이다. 얼마 안 되는 하루벌이를 위해서도 저토록 필사적으로 열심인데…”

 

​훗날 정주영은 그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유대감과 존경심을 많이 느꼈다고 합니다. 그때마다 "그래 다 같이 노력해서 하루빨리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야지"하는 생각으로 주먹에 불끈 힘을 주었다고 합니다.

 

최초의 배가 완성되던 날, 막아 놓았던 바닷물을 딱 텃습니다. 물이 웅덩이로 쏴 들어오면서 배가 붕 떴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붕 뜬 배가 바다 쪽으로 쑥 밀려 나갔습니다. 세상이 온통 뒤집어졌어요. 직원들은 서로 부둥켜 앉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단 한 척의 배도 만들지 못했던 우리가 세계적인 대형 선박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 제1의 조선국가로 성장하게 된 바탕이 되었습니다. 건조 능력 70만톤, 부지 60만평, 70만톤급 드라이 도크 2기를 갖춘 국제 규모의 조선소 준공을 본 것은 1974년 6월. 기공식을 한 1972부터 2년 3개월 만이었습니다.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준공식에 참석하여 조선입국(造船立國)’ 이라는 휘호를 써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2007년 5월 25일 현대중공업 도크에서 우리 해군의 이지스함이 진수됐습니다. 정주영이 처음 조선소를 짓겠다고 했을 때 우리 해군은 미군이 폐기 처리한 구축함을 가져다 페인트칠을 해서 쓰고 있었습니다. 천지개벽이란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이날 진수식에서 정몽준 회장은 500원 짜리 거북선 이야기를 하며 아버지 정주영 회장을 그리워했다 합니다. 지금 전세계 바다에 새로 나오는 배 5척 중 1척이 현대중공업 제품이고 10척 중 4척이 한국산이라 합니다. 한국 조선소들은 중국에 싼 가격으로 수주를 맞긴 배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주문이 너무 밀려 배를 만들 도크가 없다고 합니다.

 

 

​길이 200m에 15층 높이의 배를 땅위에서 조립해 바다로 끌고 가 띄우는데 이런 신공법은 한국 조선소에서만 하고 있으며 선박 엔진 또한 세계 최고라 합니다. 엔진을 만드는 공장의 상무는 이 기술자들을 “나라의 보물”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세계 선박엔진 시장의 45%를 싹쓸이하고 있다 합니다.

 

​그러나 2014년부터 불어닥친 불황의 여파로 몇 년 간 고전은 했지만 지금 세계의 선주(船主)들이 다시 한국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모래바람이 휘날리던 미포만은 이제 배 조립품을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비좁아졌습니다. 그곳에선 3일마다 1억 달러짜리 거대한 배가 한 척씩 쏟아지고 있습니다. 현대중공업 사람들은 “배를 찍어낸다”고 합니다.

 

​세계 조선역사에 이런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한 척의 배를 만든 이익금으로 오늘날의 현대중공업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정주영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사람이라 했나 봅니다.

 

지금 우리나라 경제계의 큰 별은 가고 없습니다. 2001년 3월 21일 당신이 설립한 서울아산병원에서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타계했을 때 미국 CNN 방송이 한 시간 이상을 특집으로 방송했는데 이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하면 된다”는 신화를 창조한 거인 정주영! 대한민국 근대사에 큰 획을 그은 경제거인이었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될 때까지 그의 업적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

 

우리는 그를 잊지 말아야 하고 위인 중의 위인, 거인 중의 거인으로 칭송받아 마땅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혼란스러운 대한민국의 어디에선가 제2, 제3의 정주영이 존재하고 그 험난한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