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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반사/感動.野談.說話

세겹으로된 쇠상자

by 가마실 2023. 6. 23.

세겹으로된 쇠상자


어스름이 내려앉은 산골짝, 다 쓰러져 가는 외딴 초가삼간에 추적추적 봄비가 내렸다. 삼년째 이엉을 못 갈아 덮어 검게 썩은 지붕에서 빗물이 새어 안방은 물바다가 되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쉬어 빠진 짠지 하나에 나물죽을 먹던 변 노인이 절름거리는 다리로 뒤꼍에 가더니 깨어진 옹기를 들고 와 새는 빗물을 받았다. 변 노인은 하염없이 낙수를 바라보다가 제 신세가 하도 서러워 어깨를 들썩이며 서럽게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소쩍 소쩍 소쩍새가 슬픔을 더했다.

딸 하나에 아들 넷, 다섯 남매를 낳고 부인이 이승을 하직하자 변 서방은 핏덩어리 막내아들을 안고 심 봉사처럼 이집저집 젖동냥을 다니며 온 정성을 다해 자식들을 키웠다. 매파가 들락날락거리며 중매를 섰지만 자식들이 계모에게 구박을 받을세라 새장가도 가지 않았다.

막내가 젖을 뗐을 때 변 서방은 자식도 없이 홀몸이 된 누님을 집에 데려다 놓고 자신은 보부상이 되었다. 바리바리 등짐을 지고 산 넘고 물 건너 천리 길도 마다 않고 걷고 또 걸어 멀쩡한 짚신이 하루를 못 견뎠다. 다른 보부상들이 주막에서 술판 노름판을 벌여도 변 서방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 아이들 생각만 하다가 잠이 들곤 했다. 서너달 만에 집에 올 때면 모은 돈을 몽땅 누님에게 맡기며 아이들 남부럽지 않게 키우라 신신당부했다. 오남매는 부잣집 아이 못지않게 좋은 옷 입고 서당에도 다녔다.

어미의 정도 모르고 자란 아이들이라 일찍 시집장가를 보냈다. 몇뙈기 안되는 논밭을 모두 팔아 살림 차려 주고 빚을 얻어 혼수를 장만해 주었다. 혼인 시키느라 진 빚은 보부상 발품을 팔아 갚아 나갔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을 돌아보니 허리는 굽었고 관절은 마디마디 쑤시고 시큰거려 더 이상 보부상을 못하고 초가삼간 제 집으로 돌아왔다.



함께 살던 누님이 이승을 하직하자 변 서방은 청승맞은 늙은 외톨이가 되었다. 변 서방은 손수 나물죽을 끓이고 빨래도 하고 외롭게 혼자 사는 것은 이골이 났지만 그의 가슴속을 꽉 채운 슬픔을 이기기는 힘들었다. 자식들이 자신을 모시지 않고 찾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변 서방은 젊어서부터 입이 무거웠는데 세월이 갈수록 더더욱 입을 닫았다.

어느 날, 아랫동네 대장간에서 이상한 물건을 만들기 시작했다. 커다란 쇠상자 속에 작은 쇠 상자, 그 속에 더 작은 쇠상자를 넣고 상자마다 튼튼한 자물쇠를 채웠다. 사람들이 궁금해서 수군거리는데 대장간 주인도 주문한 사람이 변 서방이라는 것밖에는 용도를 몰랐다. 장정 넷이 목도를 해서 쇠상자를 변 서방 초가삼간 안방으로 옮겨 놓자 변 서방은 이불을 덮었다. 이 소문을 어디서 들었는지 자식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비단 마고자를 지어 오는 며느리, 쇠고기 산적을 해 오는 며느리, 보약을 지어 오는 아들 녀석, 삼십리 밖 딸년도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떡 한고리에 꿀단지를 들고 왔다.

자식들이 서로 제 집으로 모시겠다고 해 변 서방 사지가 찢어질 판이 되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오년을 호강하다가 변 서방은 죽었다. 삼우제도 지내기 전에 자식들은 온 집 안을 뒤져 다락 구석에 숨겨진 열쇠를 찾아 쇠상자를 열고 열고 또 열었다. 맨 마지막 상자를 열자 자식들이 어릴 때 찾던 기저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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