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제시하라, 지지는 따라온다
정말 가정(假定)조차 하기 싫지만, 만약 ‘가짜 뉴스’만으로 선거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야당이 압승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에겐 거짓을 만들어낼 상상력과 창의력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자기들에게 불리한 진짜 뉴스 앞에서 발뺌하는 뻔뻔함과 그럴듯한 가짜 뉴스를 제작할 능력을 겸비한 자라면, 누구라도 당해내기 어렵다.
지난 대선 막바지에 불쑥 나온 ‘윤석열 몸통’ 뉴스만 봐도 그렇다. 거짓 인터뷰를 악마의 편집을 거쳐 마이너 매체를 통해 유포하고, 그걸 다시 정당이 선거운동 재료로 활용하게 한다는, 이 기막힌 시나리오는 아무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다. 상자 밖 사고의 창의력과 위험을 우습게 여기는 담대함, 거기에 기술적 디테일이 보태져야 가능하다. 아무튼 대선 열기로 한창 뜨거운 지난해, 대장동 의혹의 한가운데 이재명 후보가 얽혀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윤석열이 몸통이래’라고 신원 불상 스피커가 속삭이는 소리에 국민은 잠시나마 ‘오잉?’ 했다. 아, 기막힌 반전, 그리고 상상력. 만약에 그게 먹힌다면 미사일의 위력으로 지축을 뒤흔들어 우리편을 살리고 반대파를 초토화해 선거판을 뒤집을 것이다. 이런 상상력, ‘노벨 정치학상’감 아닌가.
그들의 상상력은 그 후에도 사그라지지 않고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과 청담동 심야 술집에서 노래하는 상상을 했고, 없는 사람들 사이의 대화록을 제조해 유포하기도 했다. 얼마 전 법무부 장관 집 앞에 흉기와 토치를 놓은 사람이 구속된 사건이 발생하자 ‘자작극’이라고 되치기하는 순발력도 발휘했다. 그렇다고 그런 그들을 욕할 수는 없다. 그들은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의 말대로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임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자, 유발 하라리의 이론에 따르면 침팬지에게는 없는 인간들만의 상징조작 능력의 소유자들일 뿐이다. 천안함 유족 윤청자 여사의 표현을 빌리면 “좌파는 똘똘 뭉쳐서 억지를 사실인 것처럼 탁월하게 만들어 내는 데 도사들”이다. 한마디로 능력자들이라는 뜻이다. 유발 하라리는 그 결과 침팬지는 동물원에 갇혀 있고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했다.
물론 그들이 지어내는 가짜 세상에 동조하거나, 허위 정보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게다가 우리가 또 보통 국민인가. 지난 한 세기 동안 다양한 정치 체제와 별의별 지도자를 겪으며 작지 않은 정치적 내공과 상상력을 쌓은 우리 국민은 간혹 속아주기는 해도 쉽게 당하지는 않는다. 갈수록 밝아지고 투명해지는 세상에서 결국은 진실이 거짓을 이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럼에도 부인할 수 없는 건 상상력의 힘, 그리고 그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진리다.
지난 문재인 정부도 상상하는 능력과 그걸 소통하는 기술이 탁월한 정부였다. 문제는 너무도 성공적이었던 나머지 국민이 그들이 상상하는 세상을 봐 버렸다는 데 있다. 그들은 뭔가 대한민국을 뛰어넘는 새로운 한반도를 상상했던 것 같고, 그를 위해 북한과 우호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언뜻 이해하기 힘든 군사 합의를 하고 종전 협정을 서둘렀다. 공적 영역을 키우기 위해 세금을 많이 거둬 갔고, 그렇게 모은 세금을 여기저기 뿌리기도 했지만 결국 자기들끼리 많이 나눠 가졌다. 필요하다면 통계도 조작했다. 그들은 경제를 비롯한 각 영역에서 비교적 또렷한 비전을 갖고 있었고, 그 비전을 국민에게 잘 전달했다. 그 결과 대선에서 패배한 것이다. 적어도 절반이 넘는 국민은 그들이 상상하는 세상이 펼쳐질까 우려하며 그들의 비전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지금 집권 세력은 어떤 비전이 있고 어떤 정치적 상상을 하며 살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비전이란 마치 지평선과 같아서 끝내 가 닿을 수는 없지만 계속 바라보며 앞으로 가게 하는 힘과 같은 것이다. 건강해지고 싶은 꿈을 지닌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 운동하듯이, 사람들은 상상하는 세계를 꿈꾸며 현재를 움직인다. 정치적 상상력은 그런 사람들의 꿈을 하나로 모으는 촉매제다. 사람들의 꿈을 소유하면 그들의 지지는 자연히 따라온다. 미국의 언론인이자 사회 비평가인 월터 리프먼은 이 과정을 ‘동의 제조 과정(the manufacture of consent)’이라고 불렀다. 그런 기제가 과연 지금 여당과 정부에 있는가.
최근 여당이 참패한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결과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대통령실과 집권당 사이의 긴장감 없는 수직 관계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고, 선거 전략이 부실했다는 지적과 함께 명분 없는 후보 공천이 원인이었다는 자성론도 있다. 그 모든 이유의 으뜸으로 빈약한 정치적 상상력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상상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인데, 여당은 눈에 뻔히 보이는 것도 보지 못했다. 집권 세력의 비전이란 대개 어떤 인물을 기용하는가로 드러나게 마련인데, 적어도 지금까지 보여준 인사들은 상상력의 빈곤에 지나지 않았다.
요즘에는 기업도 최고경영책임자(CEO)만으로는 부족해 최고비전책임자(CVO)와 최고소통책임자(CCO)를 둔다. 지금 윤석열 정부에는 CEO만 있고, 나머지는 없는 것 같다. 최근 각급 정부 인사들에게 국민과 소통하기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고 하는데, 그들이 무엇을 소통할지 알 길이 없다. 법조인 출신인 대통령은 사법적 진실과 정의가 중요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걸 다 가져도 결국 지배하는 건 과거일 뿐이다. 정치인으로 성공하려면 상상 영역인 미래에서 겨뤄야 한다. 유발 하라리의 지적대로 국가는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글 / 조선일보 칼럼 /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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