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독자 ‘익습’, 대를 이어 내려온 과거의 저주를 끊겠노라 다짐하는데…
삼대독자 민익습은 책을 읽다가도 멍하니 머릿속이 온통 새까만 먹물로 꽉 찼다. 과거, 과거! 그것만이 내 살길인가? 증조부가 그 아들, 그러니까 익습의 할아버지를 오로지 과거로 몰아넣었다. 과거라는 게 등에 떠밀려 되는 것인가, 어디! 몇번 낙방한 익습의 할아버지는 또다시 낙방하자 고향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평양으로 가 기생집에서 술독에 빠졌다가 노자가 떨어지자 대동강 물에 몸을 던졌다. 익습의 아버지가 대를 이어 과거에 달려들었다. 일곱번 떨어지고 나서 칠전팔기를 다짐하며 또다시 도전했지만 역시나 낙방하자 마당에 책과 책상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훨훨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호리병 나팔을 불고 “우하하하” 웃다가 “으흐흐흑” 울며 ‘과거 장례식’을 치렀다. 서당에서 돌아오다가 그 모습을 본 익습은 대문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익습은 이를 꽉 물었다.
삼대를 이어 내려온 과거의 저주! 익습은 자신이 그 저주를 끊겠다고 다짐했다. 삼세판! 익습은 열심히 공부했다. 과거를 포기한 아버지는 주색잡기에 빠져들었다. 익습이네 집은 천석꾼 부자는 아니지만 열두칸 기와집이다. 세칸 곳간은 바닥 드러난 적이 없었고 노비들이 다섯이나 됐다.
삼대째 대주가 과거에 매달리느라 집안 살림은 소홀할 법도 했다. 하지만 젊은 노비 중에 글을 깨우쳤고 부지런한 데다 성실·정직하기까지 한 집사가 안팎으로 한치 흐트러짐 없이 집안일을 꾸려나가 그 많은 지출에도 재산은 줄지 않았다.
그러나 익습의 아버지 대에 와선 살림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주색잡기에 빠진 익습의 아버지가 친구들과 술 마시고 기생을 끼고 자는 것쯤이야 괜찮았는데, 노름판에 끼어들며 일이 틀어졌다. 어떤 날엔 하룻밤에 문전옥답 서너마지기가 날아가기도 했다. 눈이 시뻘겋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문을 박차고 들어온 익습 아버지가 장롱을 열고 땅문서를 빼어내자 익습 어머니가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머리를 쥐어뜯기고 눈이 멍들었다. 새벽닭이 울고 익습 어미도 울었다. 눈발이 휘날리는 어느 새벽녘, 익습 아버지가 집으로 뛰어 들어와 장롱을 열었지만 땅문서가 없어졌고 익습 어미도 집을 나갔다. 그렇게 한해가 지났지만 가출한 익습 어미는 돌아오지 않았다.
꽃 피고 새 우는 어느 봄날, 익습 아버지는 새파란 처녀를 데려와 안방에 앉혔다. 귀밑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열다섯 처녀를 노비로 사서 끌고 온 것이다. 어렸지만 인물이 빼어났다. 익습으로 봐서는 새엄마인 셈인데 익습보다도 두살이나 어려 도저히 어머니라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이태가 지난 장마철, 익습 아버지는 설사에 이어 하혈을 하다 말복에 이승을 하직했다.
일년상을 치르고 탈상을 했다. 익습은 두번이나 과거에 낙방하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과거를 포기하고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 외가 쪽 먼 친척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삼년을 숨어 지내던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왔다. 집안 살림이 많이 줄었지만 어머니 덕에 거덜나지는 않았다.
익습이 또 정리해야 할 일은 열여덟살 새어머니였다. 매파들이 들락날락하며 새어머니를 탐하는 사람들이 드러났다. 약재상 황노인, 고리채 고영감, 천석꾼 부자 오참봉, 유기점 이첨지…. 그중에는 늙은 훈장님도 있었다.
경쟁자가 늘어나며 노비값이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 익습은 다섯살 위 집사를 데리고 주막에 가서 술잔을 주고받으며 말했다.
“집사 형도 알다시피 우리 집 살림은 반쪽이 났고, 나도 과거를 포기하고 집안 살림에 매달릴 참이라….”
익습의 말이 끝나기 전에 집사가 “아니어도 도련님댁에서 떠날 작정을 했습니다. 저를 아무 데나 팔아주십시오” 했다.
술잔이 계속 오가다가 익습이 조용히 한 얘기에 집사는 들고 있던 술잔을 떨어뜨리며 깜짝 놀라 벽에 머리를 쿵 하고 박았다.
집으로 돌아온 두사람은 사랑방에 자리를 잡고 하녀 방에서 잠자는 새어머니를 불렀다. 익습은 다락에서 집사와 새어머니의 노비문서를 꺼내 화로 위에 얹었다. 집사는 돌아앉아 흐느끼고 새어머니는 방바닥에 엎어져 울었다. 이튿날 조촐한 혼례식이 익습이네 안마당에서 치러졌다. 신랑은 스물다섯 집사요, 신부는 열여덟 익습의 새어머니였다. 익습은 논 열마지기, 밭 다섯마지기 땅문서를 집사 주머니에 찔러줬다.
며칠 후 망태를 메고 콩 심으러 들에 가던 익습이 둑길에서 노승을 만나 합장을 했더니 노승이 눈을 크게 뜨고 “자네 몸이 서기(瑞氣)에 감싸였어. 한번만 더 보게, 삼세판!” 하고 말했다. 익습은 노스님에게 등을 떠밀려 본 과거에서 급제를 했다.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66)삼세판
'☞다반사 > 感動.野談.說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우 한마리에 얽힌 사연 (0) | 2022.10.08 |
---|---|
손 씻은물에 엃힌 사연 (0) | 2022.10.08 |
나루터 주막 (0) | 2022.09.20 |
은 목걸이 (0) | 2022.09.16 |
금실 좋은 류 초시와 옥계댁 (0) | 2022.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