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러울 것 없던 최 진사, 차남 죽자
점쟁이 말 믿고 밤나무 죄다 베는데…
최 진사네 땅을 밟지 않고선 밤나무골을 지날 수 없었다. 울울창창한 밤나무 산이 서북쪽을 병풍처럼 둘러 북풍한설을 막아주고, 동남방으론 기름진 들판이 펼쳐져 오곡백과가 햇살을 듬뿍 받고, 들판 끝자락 둑 너머로 냇물이 휘돌아 가뭄이 없다. 남향받이 산자락에 고래 대궐 같은 열두칸 기와집 사랑방엔 시시때때로 최 진사와 선비들의 시 읊는 소리가 청아하다. 장남은 과거에 급제해 한양에서 처자식을 데리고 나라의 녹을 먹고살고, 차남은 무과에 급제해 함경도 변방에서 군관으로 승승장구하고 둘째며느리는 밤골 산자락 세간 난 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변방에서 두해를 보내고 후방으로 전출되면 남편 근무지로 이사할 참이다. 딸들은 모두 출가해 잘살고 있어 도대체 최 진사에겐 세상 근심 걱정이 없다. 또 몇년 전에 처가 죽어 탈상하자마자 소작농의 딸을 재취로 맞아 깨가 쏟아졌다.
세상일은 알 수가 없다. 최 진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덮쳤다. 변방에서 국지전이 일어나 차남이 전사한 것이다. 전사통지서와 화장한 분골을 받아들고 최 진사는 실신했다. 글 친구들이 모여 시 짓고 웃음소리 끊이지 않던 최 진사네 사랑방에 선비들의 발걸음은 끊어지고 무당과 당달봉사 점쟁이가 들락거리며 음험한 기운이 무겁게 깔렸다.
먹구름이 곧장 소나기를 쏟을 것 같은 저녁나절 최 진사네 마당에 집사와 하인들이 차양을 치고 멍석을 깔고 작두를 갖다놓더니 어둠이 깔리자 캥캥 징소리 요란하게 굿판이 벌어졌다. 박수무당이 입안 가득 닭 피를 뿜고, 알록달록한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작두 위에서 칼춤을 췄다. 작두에서 내려온 무당이 허리춤에서 포승줄을 홱 풀어 하얀 소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 헤친 둘째며느리를 묶자 그녀는 기절했다. 무당은 쓰러진 그녀의 엉덩이에 한발을 얹고 주문을 쏟아냈다. 꽹과리 소리에 짓눌려 주문이 또렷하지는 않았지만 “이년의 음기가….” “장수를 죽인 년….” 마디마디 독기가 서렸다.
밤이 깊었다. 최 진사의 후처가 초롱을 들고,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둘째며느리를 집사가 업고 골목을 빠져나와 논둑을 지나고 산허리를 돌아 세간 나간 둘째 집에 다다랐다. 후처가 둘째며느리 얼굴에 찬물을 붓자 정신을 차렸다.
“어머님, 죄송해요.”
“깨어났구나!”
후처가 며느리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자 며느리도 흐느꼈다. 최 진사의 후처 시어머니와 청상과부가 된 둘째며느리는 동갑내기다. 후처와 집사가 집으로 돌아가다가 노총각 집사가 “마님,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한다.
“무언가?”
“진사 어른께서 이 울창한 밤나무들을 모두 베어내랍니다.”
후처가 너무 놀라 초롱을 떨어뜨렸다. 초롱불이 꺼지자 칠흑 같은 어둠에 후처는 취한 듯 비틀거리다 풀밭에 쓰러졌다. 이튿날부터 도끼소리가 요란하게 메아리치고 산을 덮은 아름드리 밤나무가 하나둘 쓰러졌다. 동네 아이들은 울고 아낙네들은 비명을 지르고 노인들은 탄식했다. 후처가 눈물을 쏟으며 최 진사에게 매달렸고, 노총각 집사도 최 진사 앞에 꿇어앉아 밤나무를 베지 말자고 사정했지만 허사였다. 가을이 되면 밤송이가 벌어져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밤을 털어 모래 속에 파묻어뒀다가 동지섣달 토닥토닥 화로에 구워 먹는 군밤 맛을 못 보게 생겼다.
밤나무골에 밤나무가 한그루도 없이 민둥산이 됐다. 동네 사람들은 밤나무 그루터기를 캐내고 산비탈에 밭을 만들었다. 무당은 둘째며느리의 음기가 변방까지 날아가 둘째아들의 기를 빼 그가 전사했다는 것이다. 당달봉사 점쟁이는 둘째의 혼백이 아직도 둘째며느리 음기에 사로잡혀 구천을 맴돌고 있으니 양향을 내뿜는 밤나무를 없애라 했다.
때는 유월, 줄줄이 늘어진 밤꽃이 지독한 냄새를 뿜는다. 그걸 양향(陽香)이라 한다. 아니어도 가뭄에 콩 나듯이 한달에 한번도 후처 곁에 오지 못하는 최 진사가 둘째아들의 유골을 받은 후로는 아예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그날 밤, 후처가 며느리를 업어다주고 노총각 집사와 집으로 돌아오다가 호롱불을 꺼트린 후 밤나무 아래서 참을 수 없는 양향을 맡고 집사의 목을 껴안았던 것이다.
후처와 노총각 집사는 야반도주했고, 둘째며느리도 어느 날 새벽 안개 자욱한 나루터에서 첫 배를 타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한양에서 큰 요릿집을 하는 이모에게 간 것이다. 그리고 칠월 장마에 밤나무가 뿌리째 뽑힌 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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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태가 나 토사가 최 진사네 집을 덮어버렸다.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328) 밤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