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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반사/感動.野談.說話

탐욕스러운 류진사

by 가마실 2022. 12. 8.

탐욕스러운 데다 심보 고약한 류 진사
새경으로 콩 받겠단 총각 머슴 삼는데

송사가 벌어졌다. 동헌 마당에 소송을 제기한 류 진사의 대리인으로 그 집 집사가 나왔고,
소송을 당한 천 서방이 피고인이 돼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도끼눈을 한 집사가 계약서를 흔들며 말했다.
“돈 빌려 갈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담보 물건을 내놓지 못하겠다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요!
이 계약서가 잘못된 것이오?”
울상이 된 천 서방은 등이 활처럼 휜 채 두손을 모으고 말했다.
“저희 딱한 사정을 한번만 헤아려주십사 하고 이렇게 빕니다.
새벽이면 서리가 내리는 이 상달에 집에서 쫓겨나면 우리 식구들은 살길이 없습니다.
여기 이백서른냥이 있고 나머지 백칠십냥은 한달만 시간을 주십시오.”
집사는 고개를 흔들며 “내게는 그럴 권한이 없소”라고 단칼에 거절했다.
사또가 이방을 불러 귓속말을 했다. 집사와 천 서방, 이방이 동헌을 나가 류 진사 댁으로 갔다.
이방이 직접 류 진사에게 천 서방의 딱한 사정을 얘기하고 선처를 부탁했지만 “계약서는 도대체 왜 쓰는 거요?”라며 벽력 같은 고함만 들었다.
이방이 쫓겨나다시피 류 진사 댁을 나와 사또에게 고했다. 사또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이방은 들어라. 본관의 봉록을 가불해 백칠십냥을 천 서방에게 빌려주도록 하라.”
사또가 빌려준 돈을 들고 천 서방이 달려오자 류 진사는 실망의 한숨을 토했다.
류 진사가 부를 축적하는 방법은 돈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받는 것보다 채무자가 제때 원금을 못 갚을 때 담보 물건을 낚아채는 것이다.


류 진사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가을걷이를 해야 하는데 머슴이 없다.
류 진사네 머슴을 지내고 나갈 때는 울고 나가지 않는 머슴이 없다는 게 소문나 한달 남짓 머슴살이에 일년 새경의 삼할을 준다 해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머슴 거간은 주막에서 이뤄져 류 진사가 아침저녁으로 주막을 들러도 만날 헛걸음이다.
어느 날 류 진사가 기별을 받고 주막으로 달려갔더니 덩치가 산만 한 총각이 말술을 마시고 있었다.
새경 얘기가 나오자 류 진사는 귀를 의심했다.
“상강까지 37일간이라 했소? 첫날은 콩 한알만 주시고 둘째 날은 콩콩, 콩 두알. 히히히히. 다음날은 콩 네알, 히히히 그다음날은 여덟알…. 날마다 그 전날의 곱절씩. 히히히.”
류 진사는 부랴부랴 술값을 계산한 뒤 술 취한 그 머슴을 데리고 집으로 가 대문을 들어서며 고함을 질렀다.
“여봐라∼ 닭 한마리 잡으렷다!”
술이 깨기 전에 계약서를 쓰려고 류 진사는 이 덜떨어진 머슴을 데리고 사랑방으로 가 지필묵을 꺼냈다.
“자네 이름이 뭐라 했지?” 상냥하게 물었다.
“황보태산이요. 그냥 태산이라 부르세요. 히히히.”
류 진사는 부리나케 계약서 두장을 썼다. 속으로 ‘이게 웬 떡이냐’ 하며 콩 한알로 시작해 매일 전날의 곱절씩 주기로 같은 계약서 두매를 쓴 뒤 지장을 찍었다.
류 진사도 두 계약서에 지장과 계인을 찍어 한장을 태산에게 건네자
“히히히, 이런 거 나는 몰라유” 하는 걸 억지로 조끼 주머니에 집어넣어 줬다. 닭 한마리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 태산은 금세 집이 무너질 듯 드르릉드르릉 코를 골았다.


이튿날 새벽같이 일어난 머슴 태산이 류 진사를 앞세워 들로 나갔다.
덩칫값을 했다. 어리바리한 머슴 서너 몫을 했다.
그날 밤 류 진사가 콩 한알을 태산에게 던져주자 히히히 웃으니 류 진사도 킬킬 웃었다.
이튿날도 시원하게 일을 해 저녁 상머리에 콩 두알을 올려줬다.
류 진사가 몰래 문구멍으로 들여다보니 콩 두알을 자루에 넣었다.
“저 칠푼이, 킬킬.” 류 진사는 돌아섰다.
셋째날은 네알, 넷째날은 여덟알, 다섯째날은 열여섯알…. 37일을 일하기로 했는데 열흘 지나니 512알,
콩 한줌도 되지 않았다. 12일째, 2048알. 태산이
“진사 어른, 한홉이 넘습니다만 그냥 한홉으로 치겠습니다. 내일은 두홉을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류 진사는 “그려, 그려” 하며 흡족한 웃음을 흘렸다.
13일째 2홉, 14일째 4홉…. 20일째 2말5되6홉. 류 진사가 사태의 심각성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23일째는 20말48홉! 한 섬이 넘어버렸다. 혼자서 계산해보던 류 진사는 기절할 뻔했다.
30일째는 120섬이 넘고 37일째는 2만섬! 조선 천지 콩을 다 모아도 모자랄 판이다!


이튿날 태산이 들에서 일할 때 류 진사가 행랑채 머슴방에 들어가 샅샅이 뒤져도 계약서는 나오지 않았다.
그날 저녁, 태산이 들에서 돌아오자 대낮부터 주막에서 술을 퍼마신 류 진사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이 계약은 사기야! 이 사기꾼! 우리 집에서 나가!” 태산은 못 들은 척 문을 잠그고 자더니 새벽 일찍 들로 나가 일을 했다.
류 진사는 식음을 전폐하고 술로 살며 실성한 것처럼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류 진사네 가을걷이 끝나는 날 37일째 저녁 일을 마치고 들어온 태산이 홀연히 사라지더니 이튿날 사또의 호출장을 든 이방이 류 진사에게 찾아왔다. 류 진사가 다음날 출두하겠다고 하자,
이방이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계약서 들고 오시오잉∼”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갔다.
그날 밤 류 진사는 전대와 패물을 챙겨 재취도 팽개친 채 야반도주했다.


[출처 ] 농민신문 사외칼럼 -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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