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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반사/感動.野談.說話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백처사

by 가마실 2023. 1. 28.

 



부인 잃고 혼자 지내던 백 처사
어느 과부와 혼담이 오가는데


밀양의 선비촌, 류 진사는 천석꾼 부자에 학식도 높아 그의 사랑방엔
언제나 오가는 선비들로 넘쳐난다.
어느 날 허우대는 삐쩍 말랐으나 이목구비가 반듯한 백면서생이 들어왔다.
류 진사와 의례적인 통성명을 하고 사랑방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선비들이 술 한잔씩 마시고 저마다 글 자랑을 했다.
“약무한사괘심두(若無閑事掛心頭·쓸데없는 생각만 마음에 두지 않으면).”
한 선비가 운을 뗐는데 대구(對句)를 이을 사람이 없다.
모두가 한숨만 쉬고 있는데 류 진사가 말했다.

“백 처사께서 한 구절 이어주시지요.”
빈 잔에 술을 따르며 그를 바라보자 모기 소리만 하게 읊었다.
“변시인간호시절(便是人間好時節·언제나 한결같이 좋은 시절)인 줄 압니다.”
이 구절은 선시의 한 대목이다.
모두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자 부끄러운 듯 돌아앉아 술잔을 비웠다.
사십 줄에 막 접어든 백 처사는 막히는 게 없었다.
특히 주역(周易)을 논할 때면 다른 선비들은 모두 벙어리가 되었다.

해가 기울어 사랑방을 가득 채웠던 문객들이 일어설 때

류 진사는 백 처사의 두루마기를 잡았다.
류 진사가 백 처사를 유심히 보니 북풍한설 몰아치는 동짓달인데
홑두루마기에 동정은 목에 때가 새까맣게 묻어 있었다.
저녁 겸상을 물린 뒤 둘이서 또 술잔을 기울이며 류 진사가 조심스럽게
백 처사의 신상을 물어봤다.
“백년해로하자던 집사람이 시름시름 앓더니 작년 봄에 속절없이 혼자서

이승을 하직하지 뭡니까.”
백 처사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마음 둘 데가 없어 정처 없이 이렇게 떠돌아다닙니다.”
백 처사는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뚜렷이 갈 곳이 없으시면 소인의 우거에 유하시면 어떨는지요.”
류 진사는 우물 옆 별당에 거처를 마련하고 백 처사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렇게 두해가 지났다.

류 진사는 가끔씩 백 처사를 데리고 산마루 묵집에 갔다.
묵도 팔고 동동주도 파는 이 집 주모는 요즘 선비촌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딱한 처지다. 술 팔고 묵 파는 건 뒷전이고 알돈을 챙기는 건 해웃값이다.
선비촌 남정네치고 묵집 주모 치마 한번 벗기지 않은 선비가 없어
마을 부인들이 몰려와 행패를 부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어느 날 선비촌 오 과부가 묵집에 찾아왔다.

오 과부는 신랑이 없어 묵집 주모와 척질 일이 없었다.
“미친년들이 제 신랑 단속을 어떻게 했길래 남자를 겉돌게 만들어놓고
애꿎은 동생한테 와서 행패야!”
동네 모든 여자들이 돌을 던지는데 오 과부는 주모를 편들고 나섰으니
형님 동생 하며 술잔을 부딪혔다.
오 과부가 술 한잔을 마시더니 얼굴이 불콰해져 말했다.

“내가 동생한테 부탁이 하나 있네.”
“말씀하세요, 형님.” 주모가 바짝 다가앉았다.
오 과부가 한숨을 쉬더니 조용히 말했다.
“류 진사가 내게 중매를 섰지 뭔가.”
주모가 놀라 물었다.
“신랑은요?” 긴 침묵 끝에 오 과부가 말했다.
“류 진사가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백 처사야.”
“아, 그 백 처사. 사람이 점잖던데요.”
“내가 남은 인생, 이렇게 초라한 과부로 늙어 죽을 수는 없는 일이고,
류 진사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해 내 맘도 기우는데
걱정이 하나 있지 뭔가.”
“형님, 무슨 걱정이요?”
“두어달 전에 친정에 가서 친구들을 만났는데, 글쎄 과부 친구 하나가
점잖은 훈장님과 재혼을 했는데 손마디가 길쭉한 백면서생이 밤이 되어도
내 친구 과부를 돌같이 본다네. 하기야 그게 뭐 그리 중한가마는
살아가다가 부부싸움이라도 하고 나면 어떻게 화해를 하겠는가?!”
한참 뜸을 들이던 오 과부가 주모에게 부탁을 했다.
“자네가 하룻밤 백 처사를 시험해볼 수 없겠는가?”
주모가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형님, 걱정하지 마시오.”

사실 주모도 요즘 해웃값 장사를 자제했더니 온몸이 찌뿌둥하던 참.

마누라 없는 백 처사는 안성맞춤이다.
함박눈이 펄펄 내리던 밤, 류 진사와 백 처사가 묵집에 왔을 때
주모가 류 진사에게 귀띔을 했다.
둘 다 술이 잔뜩 취하자 류 진사가 통시에 가는 척 혼자서 집으로 가버렸다.
한숨 푹 잔 백 처사가 사경이 되었을 때 일어나 주모가 들고 온
찬 꿀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정신을 차렸다.
그날 밤 오래 굶었던 주모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신기의 방중술에
세번을 기절하고 동창이 밝을 때 또 한번 기절했다.
오 과부가 아침 수저를 놓자마자 득달같이 묵집으로 올라왔다.
“형님, 제가 먼저 시험하기를 잘했지요. 형님 신세 망칠 뻔했어요!
손가락만 기다란 게 고자예요, 고자!”
오 과부의 혼담은 이렇게 박살이 났다.

며칠 후 백 처사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나서

제천 왈패들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왈패 왕초의 첩을 건드린 천하의 오입쟁이 파락호 백 처사는
삼년째 도망 다니는 신세다.


[출처 ] 농민신문 사외칼럼 -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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