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에게서 아들 얻은 최참봉
씨 뿌린 자는 따로 있었으니
최 참봉은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벌써 배가 동산만 하게 부풀어 오르고 턱은 없어졌으며
걸음은 뒤뚱거렸다. 천석꾼 부자 최 참봉네 집은 안채와 사랑채 사이를 꽃담이 갈라놓고
왕래할 수 있게 조그만 중문을 달았다.
사랑채에서 굿판을 벌여도 중문을 잠가놓으면 안채의 안방마님은 몰랐다. 아니, 모르는 척했다.
최 참봉이 상스러운 잡놈인 데 반해 안방마님은 열두폭 병풍에 둘러싸여 조용히 사군자나 치는
후덕하고 조신한 대갓집 안주인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최 참봉이 중문을 열고 안채 안방으로 들어왔다.
“조부님 제삿날이 다가오는데 조상 볼 면목이 없소.”
술상 위 청주를 한잔 들이켠 최 참봉이 한숨을 쉬며 말하자 안방마님은 고개를 숙였다.
천석꾼 집안에 자식이 없어 대가 끊어질 판이었다.
최 참봉은 허리춤에서 곳간 열쇠를 풀어 술상 위에 놨다.
안방마님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자신은 첩을 들일 테니 부인은 곳간을 차지하라는 뜻이었다.
며칠 후 아직 귓불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새파란 처녀가 안방마님에게 인사를 올리고
아무 말도 못하고 꿇어앉아 눈물만 떨궜다.
“나리를 잘 모시고 대를 이을 아들이나 낳아다오.”
소작농 임 서방의 셋째딸은 그렇게 최 참봉의 첩이 돼 사랑채에 기거하게 됐다.
인물이 빼어나고 예절도 바르고 착했다. 막실에서 왔다고 막실댁이 됐다.
사랑채에는 조그만 부엌도 딸려 있어 중문을 걸어 잠가버리면 안채와 사랑채는 대문만 함께 쓸 뿐
두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최 참봉은 낮이고 밤이고 막실댁을 껴안고 처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구냐?”
“소인 진국이옵니다.”
최 참봉이 문도 열지 않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락이 익어가니 날을 잡아 마름 노릇을 하러 가야 합니다.”
최 참봉이 “곳간 열쇠를 네 마님한테 줬으니 마님 모시고 다녀오너라”라고 말했다.
진국은 최 참봉네 집사로, 글을 깨쳤고 영리하고 정직해 6년째 이 집 살림을 한치 어긋남 없이
꾸려가고 있다.
처서가 지나자 아침저녁 옷깃을 여밀 만큼 서늘했고 들판은 황금색으로 출렁거렸다.
곳간 열쇠를 찬 안방마님과 집사 진국이 이른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안방마님은 치맛단을 올리고 부지런히 집사 뒤를 따랐다.
고개를 오를 땐 진국이 안방마님의 허리를 밀어주고 개울을 건널 땐 안방마님을 등에 업었다.
늦은 점심 나절 두 사람은 막실에 다다랐다. 소작농 다섯이 마을 어귀에 나와서 두 사람을 맞았다.
‘마름은 평안감사와도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마름이 할 일은 소작농을 실사하며 작황을 보고 지주에게 들여놓을 나락 수량을 결정하는 것이다.
막실에 도착해 끌려간 집은 천 서방네다.
서너평 되는 대청에 상다리가 부러져라 씨암탉 백숙을 차려놓았다.
쫄쫄 굶으며 사십리를 산 넘고 물 건너 걸어온 안방마님은 허겁지겁 닭백숙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고 아랫목에 쓰러졌다.
안방마님이 깜빡 잠에 들었다 깼을 때 옆집 소작농 임 서방 내외가 조그만 보따리를 들고 찾아와
안방마님 앞에 꿇어앉았다.
임 서방댁이 흐느끼며 “마님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 했다.
최 참봉이 논 세마지기를 주고 첩으로 들여온 열여섯살 처녀의 부모가 바로 임 서방 내외다.
보자기를 풀어보니 솔잎에 싼 송이버섯이 향을 뿜었다.
막실 서른여섯마지기의 마름 노릇을 후하게 하고 나니 짧은 해가 떨어지고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천 서방네 식구들은 뿔뿔이 이웃집으로 흩어지고 천 서방집 안방은 마님이 차지하고
건넛방은 집사 진국이 차지했다.
송이버섯·닭·산적에 머루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고 안방마님이 배를 붙이고 눕자
진국은 윗옷을 벗은 채 마님의 다리를 주물렀다. 마님의 숨이 가빠졌다.
먹구름이 몰려와 천둥 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폭우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막실을 시작으로 이곳저곳 마름 노릇은 보름이나 걸려 끝났다.
몇달 후 막실댁이 아들을 낳았다.
최 참봉은 뛸 듯이 기뻐하며 아들을 품고 살더니 중풍으로 쓰러져 석달 만에 이승을 하직했다.
일년상을 치르고 안방에서 혼례식이 올려졌다.
안방마님이 주례, 집사 진국이 새신랑, 어린 과부 막실댁이 새신부였다.
최 참봉의 대를 이은 아들은 사실 안방마님의 주선으로 집사 진국이 뿌린 씨앗이었다.
이튿날 안방마님은 삭발하고 입산했다.
[출처 ] 농민신문 사외칼럼 -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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