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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반사/感動.野談.說話

근심이 쌓이다

by 가마실 2023. 5. 31.

근심이 쌓이다
 
어느 생원 집 막내딸이

시집을 간지 한 달만에 친정을 찾아왔다.
그런데 그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을 보자

 시집살이가 고된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여
어머니가 물었다.
"아가 시집살이가 고된 거냐 ?"


"아아니요."
"그럼 이서방이 속이라도 썩히느냐 ?"
"아아니요."
"그럼 시어머니가 너무 까다로운 모양이구나."
"아아니요."
"그럼 어디 몸이라도 아픈 거냐 ?"
"아아니요, 아프지는 않은데 아랫배에 뭐가

쌓여 있는 것 같아서 항상 마음이 께름직해요."
"너, 그럼 잉태를 한 것이냐 ?"
"아아니요. 그냥 아랫배 속이…."
아무래도 괴이하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의원을 불러 딸을 진맥해 보았으나
잉태도 아니고 병도 아니었다.


"아가, 의원의 말씀에도 잉태도 아니고 병도

 아니라는데 넌 왜 아랫배가 이상하다는 거냐?
에미한테 숨길 게 무엇이 있느냐,

어서 네가 걱정하는 걸 말해 봐라."
그제야 딸은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돌리며 한다는 말이,
"그럴 리가 없어요. 의원이 시원찮은 거예요.



 이서방이 밤에 잠자리에서 내 몸에 들어올 때면
꼭 커다란 무우 만한 것을 갖고 들어오는 데

나갈 때는 고추 만한 것을 갖고 나가지 뭐예요.
그 줄어든 몫이 내 뱃속에 자꾸자꾸 쌓이면

어떻게 되나 해서 걱정이 된단 말이예요"


천석꾼 부자 노 참봉은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
곳간에 나락섬이 그득 쌓였고 다락엔 돈 궤짝이 가득 찼다.
전대만 묵직하게 차고 나가면 못할 게 뭣이여! 저잣거리에 나가면 왈패들도
두손 모아 절하고 기생집에 들어서면 기생들이 와르르 버선발로 뛰쳐나와 소매에 매달린다.
고을 사또의 주머니를 채워주고 채홍사 노릇도 해 사또와 술자리 사석에서는 ‘형님’ ‘동생’이다.

허나 천하의 노 참봉도 되지 않는 게 하나 있다.

찬모를 쓰러뜨릴 방법이 없는 것이다.
사또의 주선으로 참봉 벼슬은 샀지만 노 참봉은 양반이 아니고, 찬모는 양반집 규수다.
스물여섯 양반집 규수가 재물만 많은 쌍것집에 찬모로 들어온 사연이 묘하다.

세살 아래 신랑이 소과인 초시에는 진작 합격했지만 대과는 판판이 낙방이요,

설상가상 병까지 얻어 드러눕게 되자 체면 불구하고 노 참봉네 찬모로 들어온 것이다.
보통 찬모 품삯의 곱절을 받고 하루 건너씩 집에 가서 자고 오기로 한 게 들어올 때 약조였다.

양반 종갓집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어란·탕평채·보푸라기 등등이 상에 오르자

노 참봉은 양반이 된 기분이다.

종갓집 맏며느리 찬모는 음식 솜씨도 빼어났지만 자태도 선녀다.

초승달 눈썹, 사슴 눈, 앵두 입술, 백옥 살결에 우수에 젖은 얼굴로 웃는 모습을 한번도
보이지 않았다.
허리를 질끈 동여맨 치마가 수밀도 엉덩이 굴곡을 그대로 드러낸 채 상을 놓고
나갈 때의 뒤태를 보노라면 노 참봉의 하초는 뻐근해진다.
그래도 우아하고 기품이 있어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렸다.

이패, 일패, 늙은 기생, 젊은 기생, 동기, 주모…. 치마만 둘렀다 하면

물불 안 가리고 쓰러뜨린 후 전대를 풀면 그만이지만 얼음처럼 차가운 찬모는 달랐다.
쓰러뜨릴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하루는 술상을 들고 사랑방에 들어온 찬모에게 노 참봉이


“안동댁, 술 한잔 따라주면 안될까.”


부드럽게 청했지만 찬모의 대답은 “나는 기생이 아닙니다.” 딱 한마디였다.

하녀들은 자신을 칭할 때 ‘쇤네’라고 하는데 찬모는 ‘나’다. 노 참봉은

그런 무안을 당하고도 할 말이 없었다.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날 밤, 술상을 들고 사랑방에 온 찬모가 한참 망설이더니


“참봉 어른, 이 말씀을 드려도 될는지….”
“말해보게.”
“신랑의 병세가 점점 깊어져 갑니다. 참봉 어른의 은혜로 특별한 품삯을 받지만 백숙을 올리고
 약을 지어오니 나가는 돈을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마침 의원께서 좋은 산삼이 들어왔다기에….”

말을 잇지 못하며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더니



 “오백냥만 빌려주시면….”


노 참봉이 즉석에서 지필묵을 꺼내더니 오백냥 돈표를 쓰고 쾅 낙인을 해서 찬모에게 주며


“빌리기는 뭘 빌리나. 그냥 쓰게.”

노 참봉이 살짝이 안동댁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기자 화들짝 놀라며 찬모가 한다는 말이



“참봉 어른의 은혜를 갚으려면 목숨도 바쳐야 되겠지만, 옛말에 병석에 드러누워 있는 사람의
 마누라는 탐하지 말라 했습니다. 탐한 사람은 죽고 그 사람의 기를 빼앗아 병석에 누웠던 사람은
 벌떡 일어난답니다.”

노 참봉이 눈을 크게 뜨고



“나는 죽어도 좋네. 자네만 안아보면!”


안동댁이 처음으로 배시시 웃으며


“참봉 어른, 나도 죽습니다. 나는 죽기 싫습니다.”


그러더니 지필로 이렇게 썼다.

‘참봉 어른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갚고자 신랑이 병석에서 일어나면 저 안동댁은 기꺼이

 참봉 어른과 잠자리를 함께할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그후 안동댁 신랑은 병석에서 일어났고, 노 참봉은 안동댁에게 동침을 요구했는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노 참봉이 불을 끄고 안동댁 옷고름을 풀려고 하자
은장도를 빼든 찬모 안동댁이


“제가 약조한 것은 잠자리를 함께한다고 했지 몸을 섞는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려 두 사람은 결국 사또 앞에서 송사를 벌이게 됐다.

자초지종 모든 얘기를 듣고 나서 사또는 단칼에 안동댁 손을 들어줬다.

며칠 후, 달밤에 동헌에서 사또가 노 참봉과 술잔을 기울이며 물었다.


“여보게 노 참봉, 송사로 봤을 때 안동댁 그년의 볼기짝을 때리려 했는데 왜 자네는 송사를
 제기했으면서 자네가 지도록 해달라 했는가? 송사를 제기한 사람이 자기가 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생전 처음 보네.”

노 참봉이 웃으며



“형님, 제가 오백냥을 그냥 줄 사람입니까? 안동댁 치마를 수없이 벗겼지요. 문제는 병석에서
 일어난 안동댁 신랑이 자기 처를 의심하며 그 큰돈이 어떻게 생겨 산삼 열두뿌리를 사게 됐는지
 꼬치꼬치 캐물어 송사를 벌인 거예요. 다 안동댁 머리에서 나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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