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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반사/感動.野談.說話

봉이김선달

by 가마실 2023. 6. 8.

봉이김선달

 

 

조선 후기의 풍자적인 인물인

봉이 김선달에 관한 설화.

 

인물전설로 개성 이북의 서도 지방에 널리

분포하여 있던 건달이야기가 현재는 여러

 야담집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다.

?문헌 정착은 1906년 ≪황성신문≫에 연재된

 한문현토소설(漢文懸吐小說)인

〈신단공안 神斷公案〉의 네 번째 이야기

 

인홍변서봉 낭사승명관(仁鴻變瑞鳳浪士勝名官)

’이 그 최초의 예인데, 이로써 그 이전인

 19세기에 이 이야기가 널리 유포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대체적인 내용은 평양 출신의 재사(才士) 김선달이

 자신의 경륜을 펼치기위하여 서울에 왔다가

 서북인 차별 정책과 낮은 문벌 때문에 뜻을

얻지 못하여 탄식하던 중 세상을 휘젓고

 다니며 권세 있는 양반, 부유한 상인,

위선적인 종교인들을 기지로 골탕을

먹이는 여러 일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구전설화는 방학중·정만서(鄭萬瑞)·

정수동(鄭壽童) 등의 인물전설과

중복되는 일화가 상당수 있어 이들과 비슷한

성격의 인물로 보고 있는데 비하여,

?여러 일화를 꿰어 하나의 전(傳)으로 꾸민

한문현토본소설은 다소 성격이 다르다.

 

구전설화에서는 본명이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소설에서는 김인홍(金仁鴻)이라는

본명과 낭사(浪士)라는 자호를 소개하며,

 

그의 건달 행각의 배경을 당대의 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풍자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하여, 그의 비범성을 부각하고 있다.

 

김선달이 봉이라는 별호를 얻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내력이 있다.

 

김선달이 하루는 장 구경을 하러 갔다가

닭을 파는 가게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마침 닭장 안에는 유달리 크고 모양이 좋은

 닭 한 마리가 있어서 주인을 불러 그 닭이

‘봉(鳳)’이 아니냐고 물었다.

 

김선달이 짐짓 모자라는 체하고 계속 묻자

처음에는 아니라고 부정하던

닭 장수가 봉이라고 대답하였다.

 

비싼 값을 주고 그 닭을 산 김선달은 원님에게로

 달려가 그것을 봉이라고 바치자,

화가 난 원님이 김선달의 볼기를 쳤다.

 

김선달이 원님에게 자기는 닭 장수에게

 속았을 뿐이라고 하자, 닭 장수를

 대령시키라는 호령이 떨어졌다.

 

그 결과 김선달은 닭 장수에게 닭 값과

 볼기 맞은 값으로 많은 배상을 받았다.

?닭 장수에게 닭을 ‘봉’이라 속여 이득을 보았다

하여 그 뒤 봉이 김선달이라 불리게 되었다.

 

〈봉이김선달설화〉는 조선 후기의 역사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인물전설이다.

 

봉이 김선달은 방학중·정만서 등 비슷한 행적을

가진 동시대의 풍자적 인물들의 설화와 함께

변모하는 사회 현상을 반영하는 새로운

인간형으로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선달이라는 호칭

 문무과에 급제하고 아직 벼슬하지 아니한 사람.

조선 중기 이후에는 주로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을 받지 못한 사람만을 가리켰다


사색당파가 곪아 터지며 사화로 이어져 피를 튀기던 암울한 시절, 조선 팔도강산을 떠돌던

훤칠한 선비가 마포 한강변 다 쓰러져 가는 흙담 움막집에 똬리를 틀었다.

그는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과거는 보지 않았다.

주역에 통달해 앞일도 내다볼 줄 알았지만 돈을 받고 자신의 지식을 파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 기인이었다.

늦가을 자랑자랑한 햇살이 찬바람을 잠재워, 선비는 보던 책을 얼굴에 덮고

깜빡 낮잠에 빠졌다가 목구멍에 끓던 가래에 잠이 깨 문을 열고 캭 퉤~ 가래를 뱉었다.

그 소리에 놀란 까마귀 한마리가 돌배나무 꼭대기에서 날아오르자 돌배 하나가 떨어졌다.

이럴 수가 있나! 배나무 아래서 놀던 동네 아이 중에 열두어살 난 여식 아이가 업고 있던,

태어난 지 넉달밖에 안된 어린 동생이 정수리에 돌배를 맞고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여자애가 아이를 안고 제집으로 종종걸음을 쳤지만 어린애는 죽고 말았다.

이튿날,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에 어미는 훌쩍훌쩍 울고 아비는 거적으로 둘둘 말아 싼

어린 자식 시체를 지게에 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선비는 독한 소주 한잔을 마셨다.

불덩어리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인(因), 과(果)!

씨앗을 뿌리면 싹이 돋아나듯이 과에는 반드시 인이 있게 마련이며, 이 인과 과 사이에는

업(業)이 있다.

책을 보지 않았으면 잠이 오지 않았고, 잠이 오지 않았으면 눕지 않았고, 눕지 않았으면

가래가 끓지 않았고, 가래가 끓지 않았으면 문을 열지 않았고, 문을 열지 않았으면

캭 퉤~ 가래를 뱉어내지 않았고, 가래를 뱉지 않았으면 까마귀가 놀라 돌배나무 가지를

박차며 날지 않았고, 까마귀가 날지 않았으면 배가 떨어지지 않았고, 배가 떨어지지 않았으면

그 어린 생명이 끊어지지 않았을 터인데!

선비는 안주도 없이 독한 소주를 계속 마셨다.

그 아이와 나 사이에 무슨 업이 있단 말인가! 선비는 괴로움을 술로 달래며 몇년을

더 살다가 죽음이 임박했음을 눈치채고 아들을 불렀다.

 

“네가 죽기 전에 네 아들에게 이 봉투를 전하며 일생일대에 가장 위급할 때 이 봉투를 뜯어보라

 일러줘라.”

 

이 한마디 유언을 남기고 선비는 이승을 하직했다.

세월이 흘렀다.

선비의 바로 아랫대(代)는 그럭저럭 살았다.

문제는 그 아랫대, 선비의 손자였다.

장가를 가서 한해 걸러 김장무 뽑듯이 아들을 쑥쑥 낳으니 흥부네처럼 밥 달라고

입을 벌리는 식구들이 오글거렸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땅이라고는 손바닥만 한 산자락 밭뙈기 몇마지기가 전부라 초근목피로

목숨을 부지하다가 앞을 가로막은 보릿고개에서는 두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죽은 선비의 손자, 이 서방은 동헌으로 찾아가 관곡(官穀)을 빌렸다.

관곡은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나라의 곳간에서 알곡을 빌려 이용하고 가을이 되면 갚아야 한다.

 

첫해 가을에는 곤장 다섯대를 맞고 나서 내년에는 꼭 갚겠다고 사또에게 철석같이 약속했다가

또 빈손으로 가 곤장 열대를 맞았다.

엉덩이가 피투성이가 돼 한달을 엎드려 누워 있었다.

문제는 다음해 가을,

 

“네놈이 이 사또를 희롱하는구나!”

 

곤장 틀에 묶이기 직전 손자는 할아버지가 일생에 한번, 위급할 때 펴보라던

그 봉투가 퍼뜩 생각났다.

어릴 때부터 유지(油紙)에 싸서 저고리 안섶 주머니에 넣어 몇바늘 꿰매서 품고 다니던 봉투!

“사또 나으리, 이번 곤장에 소인은 목숨을 잃을 것 같습니다. 제 소원 한가지만 들어주십시오.”

 

안주머니를 뜯어 작은 봉투를 꺼내 유지를 풀고 봉투를 열자,

그 속에 또 봉투, 다시 봉투를 벗기자 ‘사또는 보시오’ 이런 글이 쓰여 있어 형방이

그걸 들고 계단을 올라 동헌 의자에 앉아 있는 사또에게 전했다.

 

사또가 또 한겹 봉투를 벗기자 ‘빨리 마당으로 내려오시오’ 사또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자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오는데 꽈다당! 비가 새서 썩은 서까래 하나가 떨어져

사또가 앉아 있던 의자가 박살났다.

기절초풍한 사또가 찬물 한사발을 마시고 일어나 그 봉투의 한겹을 또 벗기자

‘내가 사또를 살려줬으니 사또는 내 손자를 살려주시오.’

토정(土亭) 이지함, 바로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쓴 그 선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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