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보다 불안하고, 가자지구보다 안전한’ 서울
우크라이나·중동·대만 해협·
한반도 同時 비상 걸리면…
이재명 대표, 대한민국이
어떤 세계 속에 사는지 알아야
노란봉투법을 통과시키고 방송 3법을 밀어붙이는 이재명 대표는 자못 위풍당당(威風堂堂)했다. 지팡이를 짚고 초췌한 모습으로 법원의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했던 때가 언제냐 싶다. 다음 날은 자신을 수사하던 검사들을 탄핵하는 일을 진두지휘했다. 뻣뻣했던 윤석열 대통령이 허리 굽히며 부탁한다는 쪽으로 변하자 고개를 치켜세운 이 대표가 대통령과 대조돼 더 크게 확대돼 보인다. ‘귀신에 씌었다’는 말이 떠오를 만큼 뭔가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국민은 쥐덫에 갇혀 뒷문이 닫히지는 않는지 노심초사(勞心焦思)하던 엊그제 그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대표는 그런 국민의 기억을 의심하거나 허장성세(虛張聲勢)로 그 기억력을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개구리도 크게 점프하기 전에는 잔뜩 몸을 움츠린다. 며칠 따뜻한 바람이 분다 해서 봄이 온 양 여기고 덤벙대면 눈보라를 만나게 되는 게 세상 이치다.
구속영장이 기각되고 이 대표가 몸을 더 낮췄더라면 그릇 크기가 달리 보였을지도 모른다. 대통령이 예산 국회 연설하는 본회의장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야당 의원들에게 손을 내밀며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여러 민주당 의원이 대통령을 외면하는 장면이 TV 카메라에 잡혔다. 어떤 의원은 대통령에게 ‘이제 물러나시지요’라고 했다는 걸 무용담(武勇談)인 양 자랑하기도 했다.
이 대표가 지금 국회에서 벌이는 공세(攻勢)는 정권에 대한 반대 표시가 아니다. 정부를 마비시키겠다는 것이다. 민심(民心)의 아랫도리 온도가 벌써 변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정부가 마비되면 그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간다. 국민은 팍팍한 살림, 쪼개지는 나라의 책임을 대통령과 여당에게 물었다. 그 결과가 강서구청장 선거다.
대통령은 선거 결과를 민심의 경고라고 받아들이고 달라지려고 하고 있다. 성과야 어찌 됐건 인요한 혁신위는 이 대표와 민주당보다 몇 배 국민 입에 오르내린다. 민주당의 옛 원로(元老)는 ‘내가 죽었다는 부음(訃音) 말고는 어떤 비판의 소리도 잊혀지는 것보다는 반갑다’고 했다. 그 기준으로 보면 민주당은 낙제점이다.
이 대표는 대한민국이 어떤 세계 속에 있는지를 모르고, 민주당은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 모르는 것 같다. 우크라이나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 지척이고,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은 대만해협과 한반도와 연동(連動)돼서 움직인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우크라이나로 보내려던 수십억 달러 군사 지원을 이스라엘로 돌렸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전쟁을 ‘계속할’ 무기를 보내고, 이스라엘엔 전쟁에서 ‘승리할’ 무기를 보낸다.
미국은 여러 전쟁을 동일한 비중(比重)으로 대처할 수 없다. 국력의 한계 때문이다. 대만해협에서 중국군과 미국·일본·대만군이 부딪치면 미국의 각 전쟁에 대한 우선(優先) 순위가 바뀔 것이다. 이와 동시에 혹 시차(時差)를 두고 한반도에 이상(異狀) 상황이 터지면 또 한 번 우선 순위가 뒤바뀔 것이다. 이 대표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다. 그런 입장에서 이런 세계와 대한민국이 걱정 되지 않는가.
얼마 전 이 대표의 ‘더러운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는 말에 어느 지인(知人) 이야기가 떠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옆자리 앉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테러 때문에 불안하시겠어요’라고 말을 건네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고 했다. ‘나라가 있어서 든든해요. 내 부모님 시절엔 나라가 없었어요. 살기 불안하지 않느냐 하지만 서울보다는 안전할 거예요.’ 물론 옆자리 승객이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사람이었다면 다른 대답이 돌아왔을 것이다. “당신네는 나라가 있어 좋겠어요. 우린 나라가 없어요. 살기 불안해요.”
이스라엘 사람의 ‘든든함의 뿌리’도 팔레스타인 사람의 ‘불안함의 뿌리’도 나라가 있고 없음의 차이다. 우리도 35년간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았다. 나라를 되찾아 대한민국을 세운 지 75년이 됐다. 대한민국 국민의 80% 이상이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할아버지·할머니에겐 나라가 없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나라는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나라는 애써 지키고 정성 들여 돌보지 않으면 무너지고 사라지는 인공(人工)의 소산(所産)이다. 누가 이 사실을 일깨워야 하는가. 그것은 지도자인 대통령과 야당 대표 몫이다.
이스라엘 사람에겐 북한 핵폭탄 아래 사는 한국이 이스라엘보다 불안스럽게 보인다. 팔레스타인 사람에겐 가자지구보다 조금 안전한 곳이 대한민국이다. 이 사실을 잊으면 나라가 위태롭다.
글 / 조선일보 칼럼 / 강천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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