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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반사/感動.野談.說話

가출

by 가마실 2022. 8. 29.

하룻밤 객방지기 된 남정네 둘 초면의 어색함 술로 풀어보는데…

 동구 밖 주막에 허 진사가 들어섰다. 기운이 쑥 빠진 목소리로 평상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모, 술 한잔 주시오.”
 몇순배 자작 술을 기울이더니,
 “주모, 나 오늘 밤 여기서 유숙하겠소.”
 “아니, 제집을 코앞에 두고 웬 객잠이오?”
 “그렇게 됐소.”

 한마디 던지고 객방으로 들어가니, 드넓은 객방에 단 한사람만이 구석에 벽을 등지고 기대앉아 달걀로 멍든 눈을 비비고 있었다. 남정네 둘이 초면에 한방 신세가 되면 서로 어색하기 마련인데 그걸 풀어주는 건 술밖에 없다.

 “역곡에 사는 우 생원이라 합니다.”
 “허 진사라 합니다.”

 우 생원이 한병, 허 진사가 한병을 사며 몇차례 술병이 들락날락하자 두사람은 하나하나 허물을 벗기 시작했다. 나이가 스물다섯 동갑내기라 쉽게 가까워진 데다 술잔이 오가며 남자의 자존심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둘 다 공통점이 있었다. 대과에 계속 낙방한 것이다. 허 진사는 열일곱에 소과에 합격해 천재 났다고 떠들썩했지만, 대과는 달랐다. 보는 족족 떨어지다가 이제는 포기해버린 상태다. 우 생원은 공부를 안해 보나마나이기에 노잣돈으로 놀다가 집으로 돌아갈 작정이다.

 “내 인생 몇년 살지는 않았지만 과거 길에 들어선 게 후회되는 대목이요.”
 우 생원의 한숨에 허 진사가 물었다.
 “그게 우 생원 인생에 가장 큰 후회거리요?”
 우 생원이 술 한잔을 들이켜더니,
 “가장 큰 후회거리는 아니요.”
 “그럼 더 큰 후회거리는 뭐요?”

 우 생원이 천장을 보며 골똘히 생각한다.
 “열두살 때, 길에서 주운 돈주머니를 돌려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허 진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우 생원이 자기 인생 최대 실수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가난한 집안은 흥부네처럼 식구들이 많기 마련이다. 우 서방네 여덟째 아들이 열두살 적에 둑길을 걷다가 길가 풀숲에 빨간 무엇이 얼핏 보여 주워보니 묵직한 주머니였다. 얼른 품속에 감추고 두리번거리며 산속으로 들어갔다. 주위에 누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쪼그려앉아 주머니 끈을 풀었다.

 “아~.” 쏟아져나오는 엽전들! 눈앞에 그동안 사고 싶던 깨엿·호떡·가죽신·쌀밥·고깃국이 어른거렸다. 그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지만 금세 마음이 어두워졌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어머니한테 수없이 들어온 말이 목구멍을 막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소년은 힘없이 타박타박 산에서 내려와 주머니를 주웠던 그 둑길에 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린 처녀는 울고불고 그 어미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둑길을 거슬러왔다. 소년은 일어서서 새빨간 돈주머니를 치켜들었다. 앳된 처녀는 소년을 으스러질 듯 꼭 껴안았다.

 거기까지 얘기하고 우 생원은 벌컥벌컥 탁배기 잔을 단숨에 비웠다. 허 진사가 물었다.

 “그것이 왜 그렇게 후회되는 일이오?”
 “그 열다섯살 처녀가 지금 내 마누라요.”

 이듬해, 열세살이 된 우 생원은 무남독녀 그 처녀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꽤 잘사는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갔으니 공부에 전념해 과거를 보고 싶은데 노랑이 장인은 우 생원을 머슴처럼 부려먹었다. 주경야독, 그래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자! 그런데 그 앳된, 그 얌전하던 처녀가 밤만 되면 어린 신랑을 가지고 놀았다.

 “과거는 무슨 놈의 얼어죽을 과거야. 아빠 엄마 돌아가시면 모두가 우리 차진데!”

 세살 연상의 마누라는 성깔도 보통이 아니었다. 주경야독이 아니라 하루도 빠짐없이 주경야색(晝耕夜色)이니 공부할 시간이 있나! 그래도 과거 때마다 과거 보러간다고 주경야색에서 해방되니 휴식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도 과거 보러가겠다니까 마누라가 주먹으로…. 눈알이 빠지는 줄 알았소. 나는 그렇다 치고 허 진사는 어째서 집을 코앞에 두고 객잠이오?”

 허 진사는 한숨을 푹 쉬더니,
 “우리 어머니 음식 솜씨 없는 게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어놓았소.”

 어린 허 진사가 먹어봐도 제 어미가 만든 음식은 엉망이었다. 김치라고 해놓으면 소태요, 장은 담가놓으면 구더기 논이 됐다. 고을에 음식 솜씨 뛰어난 박박 얽은 도 처녀가 있었다. 고을 원님댁 김치를 해주고 장도 담가줬다. 허 진사 아버지는 그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허 진사가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꼴에 매일 밤, 내 바지를 벗기고는 여성 상위로 자존심을 구겨놓아요. 김장 잘못하면 한겨울 고생, 장 잘못 담그면 일년 고생이면 되지만, 마누라 잘못 얻으면 평생 고생이라는 걸 울 아버지는 아직도 모르는구먼요! 으흐흑~.”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79)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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