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청이와 야반도주한 세록이
방세 위해 남한산성 향하는데
류 대감의 깊은 한숨에 문풍지가 떨렸다.
재작년 봄에 시집간 딸 류청이가 청상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와
초당에 틀어박혀 죽은 듯이 지내는 게 가슴 아파 류 대감은 애꿎은
안동소주만 목구멍 안으로 쏟아 넣고 있었다.
눈이 펄펄 내려 마당에 솜처럼 하얗게 내려앉았다.
열여덟살 집사 박세록이가 애들처럼 안마당에서 눈덩이를 굴리더니
날이 저물자 초당 앞에 몸통과 머리통을 올려두고 손을 털었다.
이튿날 아침, 세록이가 류 대감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사랑방으로 들어가 말했다.
“대감마님, 혹시 제가 어제 저녁에 만들어놓은 눈사람에 눈·코·입을 붙이셨습니까요?”
류 대감이 눈을 비비며 “아니”라고 답하자
“그렇다면 초당의 류청 아씨가 붙인 게 틀림없습니다” 하고 세록이가 대꾸했다.
세록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류 대감이 벌떡 일어나 들창문을 열자 아침 햇살을 받아 백옥 같은 눈사람에
밀짚모자를 씌어주며 류청 아씨가 계속 미소를 흘렸다.
류 대감은 세록이의 두손을 잡으며
“네가 우리 청이를 살리고 나를 살리는구나”
하고는 빈속에 소주 한잔을 마시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지난해 세록이가 초당 앞에 가져다 심은 홍매가 입춘이 지나자
새빨간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설중매(雪中梅), 새빨간 홍매화 위에 눈이 내렸다.
류청이는 방문을 열고 설중매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다.
봄이 가고 여름도 가고 가을이 왔다.
풀벌레 울어대는 밤에 류 대감은 술상을 가운데 두고 세록이와 마주 앉았다.
“내 술 한잔 받게.” 세록이가 돌아앉아 술잔을 비웠다.
이튿날 새벽,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골목길을 두사람이 빠져나가 첫 배를 타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
외딴 경안천 냇가 아담한 집에 단봇짐을 풀었다.
먼 길을 걸었지만 세록이는 류청이의 옷고름을 푸는 걸 잊지 않았다.
어깨가 떡 벌어진 세록이는 힘이 장사다.
새 보금자리 첫날밤, 류 대감댁 집사였던 세록이는 하늘 같은
주인집 아씨를 품에 안고 밤새 온힘을 쏟아부었고,
청상과부 류청 아씨는 참고 참았던 정염을 질펀하게 불태웠다.
날이 밝자, 집주인 홍 초시가 찾아왔다.
“그때 계약금 백냥을 냈으니 잔금이 사백냥 남았지요?”
“맞습니다. 여기 사백냥 있습니다.”
홍 초시란 젊은이는 돈을 받지 않고 이상한 제안을 했다.
“남한산성 쌓는 데 보름만 일하고 오면 잔액을 받지 않겠소.”
세록이의 귀가 솔깃해졌다.
단 보름만 일하고 사백냥이라니! 류청이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록이가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튿날 홍 초시를 따라 세록이가 남한산성으로 갔다.
규모도 엄청났지만 군졸들의 경비도 삼엄했다.
홍 초시가 치부책을 펼친 감독관과 속삭이더니 세록이를 불러 손도장을 찍게 했다.
보름이 지나고 한달이 되어도 세록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날 밤, 술 냄새를 풍기며 홍 초시가 류청이를 찾아왔다.
류청이가 따졌다. 홍 초시는 비실비실 웃으며 오히려 류청이를 겁탈하려 했다.
은장도를 빼 들어 겁탈은 피했지만 일이 심상치 않게 꼬였음을 느꼈다.
다음날 현청에 가서 따졌더니 세록이의 손도장을 보여줬다.
그날 밤에 또 홍 초시가 찾아왔다.
류청이는 은장도를 빼 들지 않고 웃는 낯으로 대하며
“우리 신랑은 언제쯤 돌아옵니까, 초시어른?” 하고 물었다.
입을 쩝쩝 다시던 홍 초시 왈
“거기서 빠져나올 길은 두가지요. 죽거나 남한산성이 완공되거나.”
“언제 완공되나요?” 류청이가 애간장이 타서 묻자 홍 초시는 비실비실 웃으며 말했다.
“십년? 이십년?”
이튿날 류청이는 바지로 갈아입고 장옷을 덮어쓴 채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저녁나절 맞은편 산에서 내려다본 남한산성은 연옥도(煉獄道), 그것이었다.
돌을 메고 가다 나자빠지는 사람, 군졸들의 사정없는 몽둥이 찜질.
류청이는 주막집 객방에 누워 또 눈물을 쏟았다.
이튿날 집으로 돌아온 류청이가 목간을 한 후 술상을 차려놓고 기다리자
홍 초시가 찾아왔다.
류청이가 따르는 술잔을 널름널름 받아 마신 홍 초시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류청이의 새하얀 종아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오라버니,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좀 편하게 해주세요.”
“어떻게?” 류청이가
“이 추운 날씨에 우리 신랑에게 누비옷 한벌 보내드리고∼” 하며 한숨을 토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홍 초시가 앞서고 류청이가 누비옷 보따리를 들고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홍 초시는 그날 밤 주막집 객방에서 류청이를 눕혀놓고 요리할 생각에
벌써 하초가 뻐근해졌다.
감독관 포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피골이 상접한 세록이를 데려왔다.
감독관 왈
“한사람이 빠지면 줄줄이 일이 중단되오. 저기 솔숲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올 동안
당신이 그 자리에서 일을 하시오.”
얼떨결에 홍 초시가 일터로 끌려가고, 세록이와 류청이는 솔밭으로 들어갔다.
밤이 되고 홍 초시가 막사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자 군졸들의 몽둥이 찜질이 이어졌다.
세록이와 류청이는 손을 잡고 달밤에 쉼 없이 걷고 또 걸었다.
[출처 ] 농민신문 사외칼럼 -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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