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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반사/感動.野談.說話

호랑이의 보은

by 가마실 2023. 1. 31.

 

박 대인, 늦은밤 산길 헤매다

늑대떼가 그를 둘러싸는데…

 

천석꾼 부자 박 대인이 오십리나 떨어진 외삼촌 상가(喪家)에 문상을 갔다가

늦은 밤 집으로 향했다. 대한(大寒)이 코앞이었지만 날씨가 봄처럼 포근해

오십리를 걷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구름에 달 가듯 설렁설렁 까치고개를 오르는데 비를 몰아오는 흘레바람이 불더니

북쪽 하늘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고갯마루는 멀었는데 흩날리던 눈발이 금세 커졌다.

바람까지 불어 두루마기 위에 입은 누비덧옷 옷깃을 여몄다.
설상가상 박 대인이 지름길을 택한 것이 잘못이었다.

북풍한설이 박 대인을 가로막았다.

 

‘어어’ 하는 사이 눈이 무릎까지 쌓이며 좁은 길이 사라졌다.

길을 잃자 박 대인은 덜컥 겁이 났다.

어둠살마저 덮기 시작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

박 대인은 소백산 자락 산속에 갇혀 허우적거렸다.
‘사람이 이렇게 객사하는구나.’ 박 대인은 몽롱한 가운데도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눈이 허리춤을 휘감아 꼼짝할 수 없었다.

늑대떼가 그를 둘러쌌다. 바로 그때, 쌍초롱이 주위를 밝혔다.
“누구시오? 사람 살려주시오. 흑흑.” 박 대인이 흐느꼈다.

‘어흥’ 산천초목이 진동하자 늑대들이 혼비백산 흩어졌다.

호랑이였다. 검은 호랑이(黑虎·흑호). 호랑이 꼬리를 잡고

눈 속에서 빠져나온 것까지는 꿈처럼 희미하게 기억이 났다.


박 대인이 눈을 떴을 땐 따뜻한 방에 누워 있었고,

관솔 불빛 아래 할머니가 걱정스럽게 자신을 내려다봤다.

이것이 꿈인가 생신가. 박 대인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쯤 박 대인이 일어났다. 너와집 할머니가

“어르신이 무슨 적선을 베풀었기에 호랑이가 목숨을 살려주었소?” 하고 물었다.

박 대인은 눈을 끔뻑이며 기억을 더듬었다.
“옛날 보부상을 했을 적에 장마철에 도롱이를 쓰고 까치고개를 넘을 때였어요.

미친 듯이 흐르는 계곡물에 고양이 한마리가 빠졌지 뭡니까.

내가 뛰어들어 고양이를 건졌지요. 그랬더니 어디선가 집채만 한 검은 호랑이가 나타나

고양이를 물고 가며 나를 뚫어지게 쳐다봅디다. 그게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 새끼였어요.”
가만히 듣던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호랑이는 영물이라 보은을 하지요.”


박 대인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몇해 전 나이가 오십줄에 접어드니 한평생 혹사한 다리가 시큰거리더군요.

마지막으로 소백산 허리를 돌며 앞으로 살 궁리를 하는데

그 검은 호랑이가 또 나타났어요.” 박 대인이 빙긋이 웃었다.

“그때는 무섭지 않았어요. 호랑이를 따라 숲속을 얼마나 걸었나,

호랑이가 온 산이 떨리게 포효하더니 바람처럼 사라지더군요. 껄껄.”

박 대인이 크게 웃었다.

“제가 산삼밭 한가운데에 서 있는 거예요.”

박 대인은 고향 마을에 다리를 놓고 서당을 세우고도 천석꾼이 됐다.


“내 은인은 둘이요. 하나는 호랑이고 또 하나는 할머니요.”

박 대인 말에 할머니는 수줍게 웃었다.
너와집에 혼자 사는 할머니는 팔자가 사나웠다.

“피붙이라고는 열일곱살 손녀가 하나 있는데 도회지에서 남의집살이를

하고 있지요. 일년에 한번 그믐날, 내가 좋아하는 깨엿을 사들고 옵니다.”

할머니는 손가락을 꼽았다.
박 대인은 너와집에서 하룻밤을 더 자고 돌아갔다.

산을 내려가며 길을 확실히 알아두려고 길목마다 두루마기를 찢어 나뭇가지에 달았다.


집에 도착한 박 대인은 방 한칸을 깨끗이 정리하고 군불을 지폈다.

또 눈이 삼일이나 내려 길을 나설 수가 없었다.

거의 장이 두번 열리는 터울이 지난 후에야 사인교를 멘 머슴들과 함께 산을 올랐다.

너와집에는 저녁나절이 돼서야 다다랐다.
방엔 불이 꺼져 있었다.

문을 열었더니 할머니는 빳빳하게 동사해 자는 듯이 누워 있었다.

손가락을 꼽아본 박 대인은 머슴들과 나흘을 그 집에서 기다렸다.


그믐날 저녁, “할머니!”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싸리문을 열고 손녀가 들어왔다.

할머니를 껴안고 대성통곡하는데 유지에 싼 깨엿이 흩어졌다.
박 대인이 자초지종을 말하고 할머니 시신을 모시고 내려가

자신의 선산에 봉분을 올리겠다고 했더니 손녀가 고개를 저었다.

너와집이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생전 할머니가 묘 터를 잡아놓았다는 것이다.


머슴들이 내려가 장례음식을 장만해오고 하인들까지 올라와 땅을 파 입관을 마쳤다.

장례를 치르고 나자 손녀가 박 대인에게 큰절하며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하고 눈물을 떨궜다.
꽃 피는 춘삼월, 박 대인네 마당에서 혼례식이 거창하게 치러졌다.

신랑은 박 대인 외아들이요, 신부는 너와집 할머니 손녀였다.

 

[출처 ] 농민신문 사외칼럼 -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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