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을이 추로지향(鄒魯之鄕)
유림의 원로 세분이 사또를 찾아왔다.
사또도 이 세분을 가볍게 볼 수 없었다.
왕년에 한양에서 높은 벼슬을 하다가 낙향했지만
지금은 그 자제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 그들의 헛기침 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동헌에 앉아 있던 사또가
황급히 마당까지 내려와 머리를 조아리며
한사람씩 손을 맞잡았다.
“대감님들께서 어인 일로
기별도 없이 이렇게 몸소 왕림하셨습니까.”
동헌 마루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다가
권 대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고을이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란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말함)인데
요즘 소문을 듣자 하니 풍기가 문란하기 그지없다 하오.
이게 사실이요, 사또?”
사또가 한숨을 토하더니 말했다.
“치정에 얽힌 사건이 몇차례 있었습니다.”
류 대감이 사또를 다그치듯 말했다.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요.
우리 고을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사또가 답했다
. “죄송합니다. 소인 부덕의 소치입니다.”
이번에는 이 대감이 나섰다.
“남녀문제에 얽힌 범죄는
엄하게 다스려야 재발하지 않는 법이오.”
권 대감이 거들었다.
“잠재돼 있는 성범죄도 모두 들춰내서
일벌백계로 다스리시오.”
사또가 쩔쩔맸다.
“네, 뿌리를 뽑겠습니다.”
“두고 보리다. 에헴 에헴.”
세 대감은 사또에게 ‘훈계 반 겁박 반’ 하고 동헌을 떠났다.
사또는 자작 술을 마시고는 이빨을 갈았다.
온 고을에 방이 쫙 붙었다.
‘고을에 만연한 풍기문란을 바로 잡고자 하니
누구든 억울하게 성희롱·성추행·성폭행당한 사람은 고발하라.’
이런 내용이었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 남녀문제는 있기 마련이고
,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들추는 게 아니라
소문날까 봐 쉬쉬하는 법.
그런데 나이 지긋한 한 여인이 동헌을 찾아왔다.
주막집 주모였다.
“나리, 쇤네는 험한 세상을 살았습니다마는
이제 열다섯살인 제 딸년만은
제가 걸어온 길을 걷지 않게 하려고 고이 키웠습니다
. 딸년은 보통 주막에 얼씬도 않지만
장날은 일손이 모자라 제 어미를 돕겠다고 국밥을 나릅니다.
그런데 못된 손님들이 제 딸년에게 집적거립니다.
특히 짚신장수 임 서방은
딸년 엉덩이를 제 마누라 것처럼….”
짚신장수 임 서방이 잡혀와
동헌 마당에서 약한 곤장 세대를 맞았다.
소문이 났다.
너도나도 동헌으로 몰려왔다.
사또는 가해자를 벌하기도 하고,
배상금을 물게 해 화해시키기도 했다.
어느 날 쪼글쪼글한 얼굴에
박가분을 덕지덕지 바른 여인네가
십년 전에 둑길 옆 솔밭에서
이 초시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발고했다.
오십줄에 접어든 이 초시가 잡혀왔다.
이 초시가 그 여인을 자세히 보더니 말했다
. “저 여자는 그때 둑길을 터전으로 삼아
호리병을 차고 아랫도리를 팔던 들병이였습니다
. 술 한잔에 5전,
치마 걷어 올리는 데 30전이었습니다
. 가끔 외상은 했지만, 성폭행이라니 말도 안됩니다.”
여인네 왈, “외상을 안 갚았으니 폭행이지 뭐요.”
사또가 킬킬 웃고는 두냥으로 화해를 시켰다.
“나도 당했어.”
“나도.” 고발이 줄을 이었다.
사또가 다른 일을 할 수 없어
매달 보름과 그믐날로 날을 정했다.
대감 셋을 모셔와 배심원으로 앉혔다.
대감들은 오랜만에 다스리는 일을 하니 신바람이 났다.
보름에 하루씩 사건을 다루니 여인들이 줄을 섰다.
그중에 눈길을 끄는 것은
고깔을 푹 눌러쓴 여승이었다.
여승 차례가 됐다.
“이십삼년 전, 을사년 유월 초닷새.
그날 소승은 혼례 날짜를 석달 하고도 나흘 앞둔
꽃다운 규수였습니다.
장맛비가 억수로 퍼붓던 그날,
밤늦게까지 뒤뜰 별당의 호롱불 아래에서 자수를 놓고 있었는데
뒷집 선비가 술 냄새를 풍기며 담을 넘어 들어와….”
여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또 옆에 앉아 있던 배심원 권 대감이 후다닥 도망을 쳤다.
잇달아 류 대감도 슬그머니 일어나 꽁무니를 빼다가
웬 여인에게 멱살을 잡혔다.
줄을 선 사람은 모두가 여인네들인데
그사이에 남자 하나가 섞여 있었다.
그 남자가 이 대감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인간이 마누라를 겁탈해
우리 가정은 풍비박산이 나고….”
똥싼놈이 큰소리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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