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째 먹도 갈지 않고 있다며?
희작이는 그날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백 대인이
별채로 가 문을 확 열었다.
포개어놓은 이불에 반쯤 누워 있던 희작이가
마지못해 일어나는 척하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우두둑우두둑 손가락만 부러뜨렸다.
“삼일째 먹도 갈지 않고 있다며?”
백 대인의 목소리엔 노기가 섞였다.
한참 만에 희작이가 한다는 말.
“기운이 손끝으로 모여야 하는데 엉뚱한 데로 모이니….”
백 대인이 문을 쾅 닫고 나와
사랑방으로 가 장죽을 물었다.
“이놈의 자식,
몸이 허하다 해서 씨암탉을 잡아줬더니
이젠 기운이 사타구니에 쏠렸다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백 대인은 하녀 삼월이를 살짝 불러
열냥을 쥐여줬다.
평소 서너냥밖에 안 주던 백 대인이
이번에는 열냥씩이나 주자
입이 벌어져 뒷물하러 가는 삼월이에게
백 대인이 말했다.
“오늘 밤은 내 방으로 오지 말고
뒤뜰 별채로 가거라.”
결국 삼월이는 희작이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손가락으로 기운이 모인 희작이는
신들린 듯이 난을 치고 매화를 그렸다.
천석꾼 부자였으나
노름판에서 재산의 반 이상을 날리고
삼년째 누워 있는 부인의 약값을 대느라
집 기둥이 흔들거리게 된 백 대인이었다.
그는 무슨 꿍꿍이속인지
지난겨울 손재주 좋은 젊은 환쟁이를 데려와
뒤뜰 별채에 기거시키며 그림을 그리게 했다.
북촌 서화점에 깨끗하게 표구를 한
희작이의 그림들이 걸리기 시작했다.
그림이 불티나게 팔려나가자
서화점 주인들이 희작이를 서로 모셔가려고 안달이 났다.
옥색 두루마기에 높은 유건을 쓴 희작이는
장안의 유명인이 됐다
. 어떤 날은 서화점에서 직접 난을 칠 때도 있어,
골동과 서화에 몰입한 호사가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서화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은
희작이의 그림이 잘 팔리고,
그림값 역시 오르자
그를 높이 평가하고
당대의 천재 반열에 올려놓았다.
희작이의 그림은 북촌 서화점에 나오면
이삼일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나 백 대인은 서화가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원래 백 대인은 서화에 별 관심도 없었고,
서화를 모으는 일도 없어
북촌에 나타나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희작이의 사군자 그림값이 오르지 않았고
북촌 서화가엔 그의 그림들이 오래 걸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희작이는 백 대인 집으로 들어올 때
백 대인과 했던 문서 계약대로
그림 판매가격의 반을 꼬박꼬박 받아 챙겼다.
하루는 백 대인이 희작이를 불렀다.
“여보게, 자네의 사군자가 너무 많이 양산돼
수집가들이 식상해하네.
산수화를 한번 그려보게.
내가 기막힌 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소를 알고 있네.
” 희작이는 지필묵을 싸들고,
백 대인은 호리병 두개에 술을 채우고
고기 안주를 싸서 집을 나섰다.
두 사람은 인적 없는 검바위산 골짜기를
반나절 걸어 올랐다.
바위에 오르자
두셋이 앉기에 알맞은 펑퍼짐한 자리가 나왔다.
내려다보는 경치가 일품이었다.
계곡에서 세수를 하고 온 희작이가
바위로 올라가 앉았다.
백 대인은 이미 고기 안주를 펼쳐놓고
술을 두잔 채워놓았다.
“목이 마르네.
우선 한잔씩 들이켜세.”
백 대인이 잔을 들었다
. 그때 희작이가 말했다.
“대인 어른 잔에 날벌레가 빠졌군요
. 그 잔을 이리 주세요.
제가 마시겠습니다.
대인께서는 제 잔을 드시고.”
“아아, 아닐세.”
백 대인이 파랗게 질려서 두손을 뒤로 짚었다.
벌떡 일어선 희작이가 백 대인의 잔을 빼앗아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켜고는
자기 잔을 백 대인 얼굴에 부었다.
“입을 꼭 다무세요. 독약을 탄 술이니.”
백 대인의 얼이 빠졌다.
“어느 늦은 밤,
통시에 앉아 있는데
집사와 대인께서 뭔가 들고 광으로 들어가더군요.
대인께서 낮잠 잘 때 열쇠를 훔쳐 광 속에 들어가 봤더니
제 그림이 산더미처럼 쌓였더군요.”
희작이가 빙긋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
. “대인께서 논밭을 팔고 고리채를 끌어들이고는
아는 사람들을 시켜 북촌 서화가에서
제 그림을 사들이게 해 값을 올린 거지요.
돈이 바닥나자 그림값도 정체….”
백 대인이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작가가 죽으면 그의 작품 값은 뛰는 법!”
희작이는 그 말을 하고는 어디론가 떠나갔고,
희작이가 독약을 마시고 떨어져 죽었어야 할 검바위에서
백 대인이 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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