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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반사/感動.野談.說話

[김삿갓이야기]복상사

by 가마실 2023. 11. 25.

 

복상사

김삿갓이 산골 마을의 어느 집 사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 즈음 김삿갓의 이름은 전국구여서, 조선 천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동네 노인들이 방랑시인 김삿갓이 왔다고 술병을 들고 와서 밤새도록 우스갯소리를 하였다. 이십여 년 전, 그 마을에 나이 많은 훈장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남모르는 고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이가 젊고 예쁜 마누라가 외방 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일이었다.훈장이 성미가 괄괄한 사내였으면 마누라를 개 패듯이 두들겨 패겠지만,그 정도로 모진 성품이 못 되어서 언제나 말로만 타일러 왔다.  

그러니까 마누라는 남편을 얕잡아 보고 못된 버릇을 좀처럼 고치지 않았다.
어느 날 훈장은 고향에 며칠 다녀와야 할 일이 생기자 마누라의 일이 새삼스러이 걱정되었다.

“나는 갑자기 볼 일이 생겨 고향에 다녀와야 하겠네.
그 사이 임자가 무슨 짓을 할지 매우 걱정스럽네그려.”

“나를 그렇게 못 믿겠거든 숫제 나의 손과 발을 꽁꽁 묶어놓고 다녀오면 될 게 아니오?”
바람을 피우는 여인일수록 머리가 영리한 법이어서 말로는 마누라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여보게, 좋은 수가 있네. 임자 불두덩에 그림을 하나씩 그려놓기로 하세.
그렇게만 해놓으면 임자가 아무리 바람을 피우고 싶어도
그림이 지워질까봐 바람을 못 피우게 될 게 아닌가?”

“뭐든지 좋으니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하구려.”
마누라는 샐쭉하며 즉석에서 쾌락하였다. 그리하여 훈장은 마누라를 자빠뜨려 놓고 두 다리를 활짝 벌리게 한 뒤,옥문 좌우 언덕에 그림을 하나씩 그리기 시작하였다.

한편 언덕에는 조(粟) 이삭을 하나 그려놓고,
반대편 언덕에는 누워 있는 토끼를 한 마리 그려 놓고 떠났다.  

훈장이 나들이를 떠나자 평소에 훈장 마누라와 정을 통해오던 놈팡이가 가만있을 턱이 없었다.  

“그 늙은이가 없으니 오늘밤은 마음 놓고 뿌리가 빠지도록 즐겨 보세.”
하고 기둥서방은 덤벼들었다. 그러나 훈장 마누라는 손을 휘휘 내젓는다.

“안 돼요! 이제부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안 돼요.”  

“안 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부터 나를 가까이 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내가 왜 당신을 가까이 하고 싶지 않겠어요.
당신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은 당신보다 내가 훨씬 더 하다우.”
여편네는 놈팡이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속옷을 활짝 벌리고 남편이 불두덩에 그려놓은 그림을 보여주었다.

놈팡이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하나는 피(稷) 이삭을 그리고 하나는 토끼를 그려놓았군 그래.
나중에 다시 그려놓으면 될 게 아닌가.”  

 “어마! 당신 말을 듣고 보니 그런 방법이 있네요.
당신은 정력도 세지만 머리가 아주 비상한 양반이네요.”  

그리하여 그들은 저녁마다 뿌리가 빠지도록 정을 나누어 오다가 남편이 돌아올 날이 되자 놈팡이로 하여금 불두덩에 그림을 깜쪽 같이 그려놓게 하였다.  

훈장은 약속한 날짜에 어김없이 돌아왔다. 
마누라는 남편 부재중에 죄를 지었는지라
유난스럽게 반색을 하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당신이 집에 계시지 않아 얼마나 쓸쓸했는지 몰라요.”  

훈장은 어쩐지 마누라의 말이 미덥지 않았다.
“그 동안에 아무 일도 없었는가?”  

“당신은 내가 그렇게도 미덥지가 않아요?”
도둑이 제 발이 저리다고 마누라는 암만해도 의심을 받는 것 같아서
내친 김에 눈을 흘기며 말했다.

“당신은 내가 의심스러워 불두덩에 그림까지 그려놓지 않았소.
그 그림이 그대로 있을 테니까 직접 검사해 보면 될 게 아니오?”
하며 사타구니를 활짝 벌렸다.  

“허허허……
임자가 그렇게까지 소원이라니 한 번 들여다볼까?”
훈장은 별다른 생각 없이 문제의 그림을 장난삼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자기는 분명히 조 이삭을 그려 놓았는데
지금은 피 이삭으로 변해 버렸고,
자기는 분명히 누워 있는 토끼를 그려 놓았는데 
지금은 서 있는 토끼로 바뀌어 버린 것이 아닌가?

내 마누라의 행실머리가 이렇게까지 대담무쌍하였던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새삼스러이 마누라를 책망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타구니를 한참 동안이나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가,
문득 훈장답게 한문 투로 이렇게 감탄하였다.

“흐음,
선종속(先種粟)했는데
후종직(後種稷)했으니 농리(農理)에
대통(大通)한 사람이요,
홍시(紅矢)가 사합(射蛤)함에
와토(臥兎)가 경기(驚起)했으니
사격(射擊)에도 명수(名手)였구나.”

먼저는 조를 심었는데
후에는 피를 심었으니 농사 이치에 밝은 사람이고,
붉은 화살로 조개를 쏘아 누워 있는 토끼를 놀라 일어서게 했으니,
사격에도 명수구나.> 

김삿갓은 거기까지 듣다가 배꼽을 움켜잡고 웃었다.
“하하하……
마누라가 그 어려운 문자를 알아들었을까요?”

“무얼 알아들었겠소. 
남편이 웃어 쌓으니까 마누라도 안심하고 웃기만 했다는군요.”
그래서 좌중에는 또다시 폭소가 터졌다.  

웃고 있는 와중에 한 노인이 씁쓸하게 한마디 했다.
“그날 밤 훈장은 자기도 누구 못지않게 정력이 왕성하다는 것을
마누라에게 과시해 보이다가,
불행하게도 마누라의 배 위에서 세상을 떠나 버렸다우.“  

“뭐요? 그러면 복상사를 했다는 말씀입니까?”  

“마누라가 워낙 외방 남자만 좋아하니까,
훈장은 열등감이 심하게 느껴졌는지
‘나도 사내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뭔가를 보여 주려고 하다가
결국은 목숨을 빼앗기게 된 것이지요.”
김삿갓은 어쩐지 인생의 허무감이 느껴져,
가슴이 써늘해졌다. 
옛글에 미자불문로(迷者不問路)라는 말이 있다.

인생에는 참된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자는 그 길을 깨닫지 못해 결국은 몰락하게 된다는 소리다.
김삿갓은 그 말이 생각나서 새삼 숙연한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