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 울던 날
성균관으로 가려고 도포를 입는 직강 한덕부를 도와 새 신부 조씨 부인이 허리띠를 매어주는데,
쾅쾅 밖에서 대문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뭣하는 작당질이냐.”
한덕부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고함을 치자, 더 큰 목소리가 대문 쪽에서 터져나왔다.
“어명이다.
한덕부는 오랏줄을 받으라.”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한덕부는 그날로 사약을 받고 황천행이 됐고, 한덕부의 아버지는 귀양길에 올랐다.
시어머니는 헛간에서 목을 맸고, 노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넋이 나간 새 신부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드넓은 집에 혼자 남게 됐다.
헛간에 초롱불을 켜 대롱대롱 매달린 시어머니 시신을 내려놓고 눈을 감겨 거적을 덮었다.
시어머니 옆에 자신도 눕기로 작정하고 은장도를 꺼내는데, 누군가 조씨 부인의 손목을 잡고 은장도를 빼앗았다.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무언가 그녀를 덮었다.
자루 속에 들어간 그녀는 모든 걸 체념했다.
얼마 동안 갔는지 가늠하지도 못할 즈음 마침내 어느 방에 이르러 자루에서 벗어났다.
방은 따뜻했고 병풍 앞에 보료가 가지런히 놓인 걸 보니 사대부 집안 사랑방쯤 됐다.
정자관을 쓰고 비단 마고자를 입은 훤칠한 장년의 남정네가 헛기침을 하며 들어왔다.
“내 몸에 손을 대면 혀를 깨물어 자결할 거요.” 하자, 그 남자는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안심하시지요.
부인을 살리려고 수하의 사람들을 보냈소이다.”
하지만 조씨 부인은 여종이 들고 온 잣죽에 수저도 대지 않았다.
‘어떻게 죽을까’ 생각만 하고 있던 조씨 부인이 밥상을 들고 온 여종과 말문을 텄다.
그해는 기묘년, 새신랑 한덕부는 사림파였고 이 집 주인 정택은 훈구파라는 걸 알았다.
정택이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을 때 한덕부는 그를 상관으로 모셨다.
정택은 훈구파였지만 현직에서 물러난 상태였고, 칼춤을 추며 사림파의 목을 칠 위인이 아니었다.
부인은 십 여 년 전에 병사하고, 딸 셋은 모두 출가시키고 이때껏 혼자 살아온 사십대 중반의 점잖은 선비였다.
조씨 부인이 지아비의 시신이나 수습하고 목숨을 끊으려는데, 하루는 정택이 말했다.
“수하를 시켜 한 직강의 시신을 수습해 한씨네 선산에 가묘를 썼소이다.
아직까지 부인이 나서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며칠 후 조씨 부인의 몸과 마음에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바로 뒷산에서 뻐꾸기가 울던 날이었다.
“뻐꾸~욱 뻐꾸~욱.”
초여름 싱그러운 녹음 속에서 청아하게 울려 나오는 뻐꾸기 소리를 듣고
조씨 부인은 목간을 하고 머리를 빗고 하녀가 갖다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여종에게 말했다.
“오늘밤, 나리를 드시라 해라.”
그날 밤 조씨 부인은 정택을 받아들였다.
지아비로 깍듯이 섬겼다.
얼굴에 수심이 사라지고 해맑은 미소가 감돌았다.
정택도 조씨 부인을 끔찍이 아꼈다.
조씨 부인이 보쌈당해 와서 재취가 됐다는 걸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심지어 조씨 부인의 친정에도 알리지 않았다.
조씨 부인의 배가 불러오더니 엄동설한에 달덩이 같은 고추 달린 놈을 낳았다.
딸 셋을 출가시키고 아들이 없던 정택은 크게 기뻐했고, 산모 조씨 부인은 눈물을 흘렸다.
조씨 부인은 대문 밖 출입을 하지 않지만,
집안이 넓어 철따라 봄이면 매화, 여름이면 연꽃, 가을이면 국화꽃으로 세월 가는 줄을 몰랐다.
이년 반 후에 조씨 부인은 또 아들을 낳았다.
정택의 입이 찢어졌다.
춘하추동이 돌고 돌아 맏아들 영각이 다섯 살이 돼 서당에 가니 훈장님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취월장이다.
영각이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정택이 조용히 조씨 부인 손을 잡고 말했다.
“부인, 며칠 전에 한 직강의 아버님이 귀양에서 풀려났소.
가마를 준비해 놓았으니 날이 어두워지면 떠나시오.
아 참, 영각이도 데려가시오.”
조씨 부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마 속에서 영각이 조심스레 말했다.
“어머니, 가마에 오르기 전에 아버님이 저를 꼭 껴안고 눈물을 떨구시더라구요.”
칠 년 만에 돌아온 집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초췌해졌지만 활짝 웃으며 시아버지가 영각을 끌어안았다.
“내 새끼 내 새끼!
넓은 이마와 튀어나온 뒤꼭지, 짧은 인중, 그래그래.”
일곱 살 영각이는 처음 보는 할아버지 품에 안겨 어쩔 줄을 몰라했다.
조씨 부인이 영각이에게 귓속말을 했다.
“너의 이름은 정영각이 아니라 한영각이다.”
뻐꾸기 울던 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 죽으려고 했던 조씨 부인이 정택의 품에 안겼을까.
한덕부가 오랏줄에 묶여 죽임을 당하기 바로 전날 밤, 조씨 부인은 운우(雲雨)의 정을 나눴다.
보쌈을 당한 지 보름 동안 남편 시신 수습할 궁리로 제 목숨 끊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서답에 피가 보이지 않았다.
달거리가 끊어졌다는 것은 남편 한덕부와의 마지막 교합에서 임신이 됐다는 얘기다.
삼대 독자, 한씨네 대를 이을 자식!
바로 그날, 뻐꾸기 소리를 듣다 탁란(托卵·남의 둥우리에 알을 맡기는 일)이 생각났다.
잘 키워 서당에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정택에게 탁란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부랴부랴 정택에게 몸을 맡겼다.
영각이를 낳아 기르면서 정택이 제 자식이라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가마를 탈 때 알았다.
정택은 영각이 한덕부의 아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흘 후 가마가 밤길을 걸어 정택네 집에 닿았다.
가슴 졸이던 정택이 손수 가마 문을 열고 조씨 부인의 손을 잡았다.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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