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생원의 사부님
오생원은 요즘 도대체가 살맛이 안 난다.
입맛도 술맛도 없고, 치마를 벗기는 재미도 없다.
배는 동산만 하게 올랐고, 앉았다 일어나기도 힘이 들고,
마실 갔다 오는 데도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파 대문 기둥을 잡고 헥헥거리다가 마당으로 들어온다.
마흔도 안 된 오생원은 만석꾼이다.
“강집사~ 곰 발바닥 요리가 맛있다더라.”
오생원이 입만 뻥긋하면 날쌘 강집사는 강원도 포수한테 달려가 곰발바닥을 구해오고,
팔도강산 맛있는 것은 빠짐없이 구해왔다.
그런데 요즘 어느 것 하나 맛있는 게 없다.
조선천지 이름난 명주 다 마셔도 쓰기만 하다.
오생원은 첩을 다섯이나 뒀다.
“일목아~”
오생원은 애꾸눈 행랑아범을 최서방이라 부르지 않고 언제나 눈이 하나라고 일목(一目)이라 부른다.
통시에서 보던 일도 덜 보고 달려오는 행랑아범을 행동거지가 굼뜨다고 등짝을 후려쳤다.
“외출 채비를 해라.”
행랑아범이 당나귀를 몰고 와서 옆에 엎드리자 오생원이 그의 등을 밟고 당나귀를 탔다.
다섯째 첩 집으로 갔다.
땅거미가 질 때 들어가더니 무엇이 틀어졌는지 사경이 되기 전에 와장창 고함소리와 함께
뒤뚱뒤뚱 나와서 “집으로 가자.” 하며 당나귀 등에 올랐다.
등에 오르자마자 앞으로 고꾸라져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나.
두세 식경이면 집에 다다를 텐데 아직도 나귀등에 타고 있으니 이게 웬일인가!
오생원이 잠이 깨서 일어나려는데 말도 할 수 없고 눈을 떠도 깜깜하다.
몸부림을 쳐봐도 허사였다.
옷을 입은 채 설설 오줌을 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공포와 피곤에 정신을 잃었다.
마침내 당나귀가 걸음을 멈췄다.
눈을 가렸던 띠를 풀고 입을 막았던 수건을 풀었지만 오생원은 벌벌 떨기만 할 뿐 말문을 열지 못했다.
낮은 낮인데 울울창창한 숲이 하늘을 가려 컴컴했다.
다 쓰러져 가는 낡은 통나무 너와집이 보였다.
“최최최.. 서방, 여기가 어디며 왜 이러는 거야?”
쪽마루에 걸터앉아 담배 한 모금을 맛있게 빨던 행랑아범이 껄껄 웃으며 비꼬았다.
“최서방이 누구여?
나는 일목인데...”
“지금부터 내가 상전이고 너는 하인이여!”
행랑아범이 낙엽더미를 치우자 독들이 나왔다.
“이건 쌀독, 이건 간장독, 이건 된장독….”
그날 저녁부터 오생원이 하인이 되어 밥을 짓고 장작을 날라다가 군불을 지폈다.
관솔불 아래서 밥하고 행랑아범이 뜯어온 산나물만 된장에 찍어 먹는데 밥맛이 꿀맛이다.
그날 밤, 행랑아범이 불러주는 대로 오생원은 글을 써내려갔다.
‘여보 임자, 이글을 보는 대로 만 냥을 만들어 뒷산 용바위 아래 소나무 옆에 묻어 두시오.
발설하면 내 목숨은 저승에 가오.’
이튿날 오생원을 묶어두고 행랑아범은 어둠을 틈타 하산해 집 대문 틈에 쪽지를 끼워두고 왔다.
며칠 후, 행랑아범이 사십리 길을 단숨에 내려가 용바위 아래 소나무 밑을 파봤지만 허사였고,
대문에 가봤더니 분명히 꽂아 둔 쪽지도 없어졌다.
하루는 오생원 상투를 자르고 비단 마고자를 벗겨 보자기에 싸서 담 너머 던져 넣고 며칠 후 용바위 아래를 파봐도 허탕.
행랑아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오생원 부인이 ‘한평생 속만 썩인 영감탱이 저승이나 가라지.’ 하고 생각한 걸까?
그럭저럭 넉달이 흘렀다.
“최 두목님, 오늘 저녁은 뭘로 할까요?”
오생원이 물었다.
“감자 넣고 수제비 맛있게 끓여 봐.”
행랑아범의 대답이다.
행랑아범은 사실 3년 전 관군이 쳐들어올 때까지 이곳에 있던 산채의 두목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날 밤, 산채 밖에서 횃불이 어른거리고 함성이 들리더니 관군이 들이닥쳤다.
그때 오생원이 고함쳤다.
“내 사부님을 건드리지 마라.”
진두지휘한 처남도 어리둥절해하고 관군들은 눈을 크게 떴다.
가장 놀란 사람은 행랑아범이다. 오생원이 말을 이어갔다.
“내 몸을 좀 봐라.
배가 쑥 들어갔고 턱이 살아났다.
나물밥을 먹어도 꿀맛이고 막걸리를 마셔도 감로주야.
감자 농사도 내가 지었어.
모두가 내 사부님 덕택이야!”
하산해서 집에 가니 부인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오생원을 얼싸안았다.
첩 다섯은 각자 살던 집을 팔아서 모두 도망갔다.
오생원 부인은 협박 편지를 못 봤다.
동네 아이들이 그걸 뽑아 제기를 만들었고,
상투와 비단 마고자를 싼 보자기는 감나무 가지에 걸린 걸 지나가던 거지가 들고 갔다.
오생원 처남은 어떻게 산채로 관군을 데리고 왔는가?
산속을 헤매던 심마니가 오생원을 보고 알려줬던 것이다.
그날 밤,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안방으로 들어가 부인의 옷고름을 풀었다.
산삼과 녹용을 먹지 않았는데도 부인을 두 번이나 기절시켰다.
오생원은 과부가 된 누이와 행랑아범의 혼례를 올려주고 집과 논밭 서른 마지기를 떼어줬다.
오생원 자신도 밭 세 마지기를 떼어 손수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원작자: 조주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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