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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반사/感動.野談.說話

노응대감

by 가마실 2024. 1. 9.

노응대감


노은(魯銀)대감은 임금을 모시고 한평생 궐내에서 승지로 봉직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해

사랑방에 진을 치고 향리의 선비들과 고담준론을 나누고 술잔을 돌리며 세월을 낚고 있다.
자주 어울리는 사람은 청죽(靑竹)대감이다.

청죽대감으로 말하자면 죽마고우이자 같은 서당을 다니던 동창으로 함께 급제하여 나라의 녹을 먹다가 낙향한 사이.

청죽대감의 여동생이 노은대감의 부인이 되었으니 처남 매부지간도 된다.

노은과 청죽은 그렇게 친하면서도 성격은 딴판이다.
청죽대감이 얌전한 샌님인데 반해 노은대감은 화통한 한량이다.

노은대감은 술을 좋아하고 풍류를 즐기고 특히나 여자를 후리는 데는 도가 텄다.

한평생 치마폭에 싸여 살아온 것도 모자라 오십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 버릇을 못 고치고 있다.

사실 노은이 여자를 후린다기보다 여자들이 노은만 보면 꼬리를 친다는 말이 더 맞겠다.
팔척장신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떡 벌어진 어깨에 목소리 또한 우렁찬 데다 여자를 다루는 솜씨도 빼어났다.

이날 이때껏, 수없이 많은 치마를 벗겼지만 말썽 한번 생긴 적이 없었다.

수없이 새로 만나고 수없이 헤어져도, 이를 갈며 뒤돌아가는 여인이 없었던 것이다.

노은대감은 잘난 여자, 못난 여자, 늙은 여자, 젊은 여자, 양반, 천민 가리지를 않았다.

그렇게 바람을 피우면서도 조강지처를 소홀히 대하지도 않는다.
허나, 세월은 속일 수가 없었다.
사십대까지만 해도 바깥에서 그토록 여자를 품고도 집에 오면 안방으로 들어가는 걸 잊지 않아 조강지처 얼굴에 화색이 돌았는데,

오십 줄에 들어서자 자연히 안방 출입이 드물어져 부인의 눈치를 보는 처지가 되었다.
노은대감의 친구이자 손위 처남이 되는 청죽대감은 허우대가 볼품없는 데다 주색을 멀리하고

한평생 추구해 온 실학(實學)에 몰두, 한 마지기 밭에 양계장을 차렸다.

닭의 혈통을 개량해 가가호호에 우량종을 분양하겠다는 것이다.

눈이 펄펄 내리던 어느 포근한 날.

노은대감은 부인과 손을 잡고 눈 오는 산천경개를 둘러보러 가다가 청죽대감의 양계장에 들렀다.
“어서 오시게~”
청죽대감이 활짝 웃으며 노은대감 부부를 맞았다.

청죽대감이 이곳저곳을 안내하다가 장난기가 발동했다.
“저기 저 노응대감을 한번 보게.”
홀로 홰에 버티고 서 있는 우람한 장닭을 가리켰다.

노은대감이 깜짝 놀라자 청죽대감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저 장닭은 늙을 노(老)에 매 응(鷹)자, 노응대감이라네.”
자신의 이름을 빗댄 닭 이름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노은대감은 꾹 참았다.

청죽대감의 설명이 이어졌다.
“저 노응대감의 풍채를 한번 보게.

눈과 부리가 매를 닮았지 뭔가.

더구나 닭으로서는 노년기에 접어든, 인간으로 치면 오십 줄에 접어든 놈이 하루에 서른 번씩이나 암탉을 올라탄다오.”
청죽의 여동생이자 노은의 부인이 생긋이 웃으며 눈을 흘겨 노은대감을 향해 “대감, 들었어요?” 하자 

그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노은대감이 청죽대감에게 물었다.
“저 노응대감은 한 암탉에만 올라탑니까?”
한 방에 청죽대감과 부인의 입을 꿰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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