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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반사/感動.野談.說話

삼월이

by 가마실 2024. 1. 10.

삼월이

박 장군 댁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그 정정하던 안방마님이 빙판에 넘어져 꼼짝 못하고 드러누운 것이다.
박 장군의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도 한풀 꺾여, 매일 사냥을 다니던 발길도 끊고 부인 병수발에 매달렸다.
목관(牧官)으로 한평생 봉직하고 물러난 박 장군은 오십줄에 들어섰지만
아직도 쌀 한가마를 번쩍 들어올리는데, 부인 병수발에 꼼짝도 못하니 죽을 지경이다.

살판난 사람이 하나 있다.
박 장군의 며느리다.
시집살이하던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드러누웠으니 꺼릴 게 없다.
입 무거운 시아버지 박 장군은 며느리에게 잔소리할 위인이 아니요, 남편은 함경도 변방에서 군 복무중이라.
입 속의 혀 같은 몸종 삼월이까지 옆에 있으니 제 세상이 온 것이다.
엉치뼈에 금이 가 일어나 앉지도 못하는 시어머니가 두 해째 누워 있으니 엉덩이에 욕창이 생겨 안방에는 악취가 진동을 한다.
안방에 붙어 있는 사람은 박 장군과 삼월이뿐이다.
며느리 옥천댁은 시어머니 약사발을 들고 안방에 들어왔다가 코를 틀어쥐고 뛰쳐나가 웩웩 토하고 말았다.
그 통에 약사발이 쏟아져 환자의 몸을 닦던 삼월이가 쏟아진 약을 닦아도 박 장군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며느리 새댁이 시집올 때 데리고 온 몸종, 삼월이는 새댁보다 두 살 아래로 어릴 때부터 새댁의 명에 못하겠다고 말해본 적이 없다.
시집에 데리고 와서도
“삼월아, 얼음 깨고 노란 미나리 베어 와서 살짝 삶아 무쳐다오.”
“삼월아, 내 목간 준비해라.”
“삼월아~ 삼월아~.”
요즘은 삼월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박 장군을 도와 물수건으로 안방마님 몸을 닦으랴, 대소변을 받으랴, 속옷을 갈아입히랴,
그 와중에도 새댁은 별채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어느 날, 새댁이 깜짝 놀랐다.
삼월이가 헛구역질을 했다.
새댁이 삼월이와 바짝 마주 앉았다.
“삼월아, 아비가 누구냐?”
삼월이는 고개만 떨군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당쇠냐?
집사냐?
말 좀 해봐라 말 좀!”
새댁은 집안 남자들을 모두 뒤꼍으로 불러 세웠다.
“삼월이 아비가 누군지 앞으로 나와!
내가 내년 봄에 혼례식을 올려줄 것이야!”
아무도 나서지 않자 악을 썼다.
“꼭 밝혀질 거야.
그때는 작두로 그걸 잘라 버릴 거야!”
백방으로 알아봐도 삼월이 뱃속 씨앗의 아비는 밝혀지지 않았다.

새댁은 한의원에 가서 애 떨어지는 약을 한 첩 지었다.
삼월이에게 먹일 약을 삼월이한테 달이라고는 할 수 없어 이튿날 몸소 낙태시키는 약을 달이기 시작했다.
약사발을 들고 삼월이를 불렀지만 집안 어디에도 없었다.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하인들을 시켜 삼월이를 찾으러 보냈지만 허사였다.
삼월이가 사라지고 난 뒤 당장 불편해진 건 부인 병수발을 드는 박 장군이었지만, 더더욱 불편해진 것은 새댁이다.
그때, 박 장군 부인이 세상을 떴다.


꽃 피고 새 울고, 장맛비에 호박순이 쑥쑥 자라고, 우수수 낙엽이 흩어지고, 북풍한설 몰아치며 어느덧 5년이 흘렀다.
상복을 벗어 불사른 박 장군은 이삼 일씩 집을 비웠다.
새댁이 박 장군 댁의 안주인이 되었다.

초설이자 서설이 펄펄 내리던 어느 날, 가마 하나가 박 장군 댁에 들어섰다.
하인 하녀들과 새댁이 나와 낯선 가마를 에워쌌다.
가마 속에서 우아한 여인네가 대여섯 살 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내렸다.
5년 전에 사라졌던 삼월이었다.
박 장군이 사랑방에서 나오자 삼월이의 손을 잡고 있던 아이가 “아버님, 저희가 왔습니다” 하면서 두손 모아 허리를 굽혔다.
“네 형수에게도 인사드려라.”
아이는 새댁에게 “형수님, 처음 뵙겠습니다.” 공손히 인사를 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는 새댁에게 박 장군은 삼월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부터 너의 시어머니다.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깍듯이 모시렸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자 며느리가 머리를 숙였다.
“네, 아아아버님….”
며느리가 쩔쩔매는데 삼월이는 꼿꼿이 서서 입을 열었다
“에미야, 따뜻한 물 한사발 떠오너라.”
며느리가 뒤돌아보자 박 장군이 새댁에게 일갈했다.
“너 보고 하는 소리야.”
“네, 어머님.” 하며 부엌으로 가는 며느리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술 취한 발걸음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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