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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반사/感動.野談.說話253

말이 씨가 되다 말이 씨가 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아궁이에 장작불 넣으랴 주걱으로 가마솥의 조청 저으랴 바쁜 와중에도 추실댁의 머릿속에는 선반 위의 엿가락 셈으로 가득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엇그제 팔다 남은 깨엿 서른세 가락을 분명히 선반 위에 얹어 뒀는데 엿기름 내러 한나절 집을 비운 사이 스물다섯가락밖에 남지 않았으니 이건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방에는 열한 살 난 아들밖에 없고 그 아들은 앉은뱅이라서 손을 뻗쳐 봐야 겨우 문고리밖에 잡을 수 없는데 어떻게 엿가락이 축날 수 있단 말인가. 추실댁은 박복했다. 시집이라고 와 보니 초가삼간에 산비탈 밭 몇 마지기뿐인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다 신랑이란 작대기가 골골거리더니 추실댁 뱃속에 씨만 뿌려 놓고 이듬해 덜컥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다. 장사를 치르고.. 2022. 12. 29.
마누라 길들이기 마누라 길들이기 법 없이도 살아갈 착한 선비 오서방이 장가를 갔다. 새색시는 오서방과 달랐다. 양반 가문에 오백석 부잣집의 고명딸이라 언행이 기고만장해 첫날밤부터 얌전한 오서방을 깔아뭉갰다. 신랑이 신부의 옷고름을 푸는 게 아니라 신부가 신랑의 바지 끈을 풀었다. 오서방은 어이가 없었지만 눈을 감았다. 새색시의 오만방자한 행실은 신부 집 신행을 마치고 오서방 집에 오는 첫날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당에 첫발을 디디자마자 지붕을 쳐다보며 “이그~~초가삼간이라더니 이 집이 그 집이네.” 오서방의 오장육부를 북북 긁어놓더니 방에 들어와서는 냄새가 난다고 향을 피우라며 소란을 떨었다. 한평생 남과 말다툼 한번 해본 적 없고 목소리 한번 높여본 적 없는 오서방은 빙긋이 미소를 머금고 새색시 하자는 대로 해줬다... 2022. 12. 29.
효자 賞과 불효 罰 효자 賞과 불효 罰 사또가 부임하고 나서 첫번째 할 일이라며 이방이 일러주는 걸 보니 효부와 효자를 표창하는 일이었다. 전임 사또가 다 뽑아놓은 일이라 호명하는 대로 앞으로 나오거든 몇마디씩 칭찬의 말을 하고 준비한 상품을 주면 되는 것이라고 이방이 일러주었다. 이방이 장활하게 효자의 효행을 부연설명했다. “이번에 효자상을 받을 까막골 이운복은 아침 저녁으로 절구통에 나락을 손수 찧어 키질을 해서 언제나 햅쌀밥같이 차진 밥을 그 아버지 밥상에 올린답니다.” 사또가 고개를 끄덕이며 “효자로다”라고 말했다. 사또가 동헌 대청 호피교의에 높이 앉아 내려다보니 효부 효자상 표창식을 보려고 몰려든 고을 백성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효자상, 까막골 이운복.” 이방이 목을 뽑아 길게 소리치자 수더분한 젊은이가 올.. 2022. 12. 21.
운명을 깨다 운명을 깨다 초산고을 기생 설화는 나이 16세에 사또의 눈에 들어 수청을 들게 되니 사또는 그녀를 무척이나 총애하여 다른 기생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꽃 같은 세월을 보내던 중 갑자기 사또가 내직을 맡아 한양으로 올라가게 되자, 사또는 쓰던 집기와 세간을 모두 설화에게 넘겨주고 많은 돈까지 챙겨 주며 마지막 밤을 잠 한숨 자지 않고 정을 나눴다. “내 너와 정이 깊이 들어 한양에 가서도 너 없이는 못살겠구나. 내가 먼저 올라가니 너도 살림을 정리하여 한양으로 올라오너라. 한평생 함께 살 것을 대장부 일언으로 약속하노라.” 이에 설화는 눈물을 쏟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화는 점을 보러 갔다. “너는 나이 많은 영감님의 첩으로 살 팔자니라. 젊은 남자와 살면 제명을 채우지 못할 게야.” 설화의 마음은 굳어졌.. 2022. 12. 21.